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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괴로워 위안소 탈출도”(훈 할머니 새로운 증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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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괴로워 위안소 탈출도”(훈 할머니 새로운 증언:2)

입력
1997.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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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3일째 지쳐 잠들다 붙잡혀/하루 두끼 식사에 바쁠땐 굶기 예사/평생 같이 살자던 다다쿠마 1년만에 떠나『싱가포르에서 프놈펜으로 항해도중 배에서 내렸던 곳은 사이공. 이 곳은 내가 이제까지 「프리잉코」로 알고 있었는데 캄보디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프레이노코르(Preynokor)로 알려져 있다.

프놈펜에 도착해보니 싱가포르보다는 위안소 규모가 컸고 한국여자 7, 8명 외에 베트남여자도 2명 있었다. 베트남인 요리사도 있었지만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몹시 바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하고 목욕을 한뒤 관리인이 지급한 화장품으로 곱게 단장을 했다. 식사는 아침과 하오 늦게 두 차례 제공됐는데 그나마 바쁠 땐 손님을 받느라(할머니는 군인들이 찾아오는 것을 「손님을 받는다」고 표현했다) 밥 찾아 먹기도 힘들었다.

군인들은 적을 때는 하루 2, 3명, 많을 땐 10명이 넘게 찾아왔다. 취침시간은 일정치 않아 손님이 찾아오면 밤에도 일을 해야 했고 손님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으면 바로 잠을 잘 수 있었다. 손님들중에는 더러 말을 듣지 않는다고 고함을 치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구타를 당한 일은 없었다.

그 상황이 너무 괴로워 싱가포르에서 한번 도망친 적이 있었다. 더 이상 나 자신에게 죄를 짓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어둠속을 달리다 나무뿌리에 채고 넘어져 발목에 생긴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렇게 3일동안 도망다녔으나 지쳐서 「미은」(열대과일)나무 아래서 깜박 잠이 들었다가 붙잡혀 위안소로 다시 끌려왔다. 그뒤로는 도망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곳을 떠나봐야 혼자서 고향에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도 없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서 프놈펜으로 옮긴뒤 1년쯤 지났을 때 한국인 위안부 2명이 죽어나갔다. 그러자 관리인은 겁이 났는지 우리들을 매주 일요일 군인병원으로 데려가 진찰을 받도록 했다. (할머니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됨)

프놈펜에서 2년여를 보낸뒤 다다쿠마 쓰토무(지웅력) 당시 중위를 만났다. 그는 위안소에 자주 들러 자고 가기도 하고 군인차에 태워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며칠씩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다다쿠마를 만난 뒤에도 그가 찾아오지 않을땐 다른 손님을 받아야 했다.

당시 누가 주었는지 모르지만 내 사진이 붙은 증명서 같은 걸 갖고 있었다. 뭔지 몰라도 내게는 소중한 것으로 생각돼 동생에게서 받은 편지 두 통, 옷가지 등과 함께 작은 함에 보관해 두었는데 누군가 그 함을 훔쳐가 버렸다. 그 증명서를 잃고 난 뒤 이제는 고향에 갈 수 없게 됐다는 생각에 며칠동안을 하염없이 울었던 게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일본이 패망한 뒤 함께 있던 한국위안부들은 모두 고향으로 떠났다. 그러나 나는 다다쿠마가 「당신을 지켜줄테니 여기서 함께 살자」고 매달려 배를 타지 못했다. 그를 따라 프놈펜시의 「프놈사원」에 가서 서로의 머리카락을 잘라 한데 모아 태우며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의 곁은 떠나지 말자고 부처님 앞에서 맹세했다. 하지만 그는 1년뒤 나를 버리고 매정하게 떠나버렸다』<프놈펜=이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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