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민주투쟁의 역사는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시작되고 민주화의 역사는 6·29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6·29의 10주년을 맞으며 민주화의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보고 싶어진다.실로 민주주의는 건국이래 우리 국민의 지고의 가치가 되어 왔다. 정의중의 제일의였고 모든 것에 우선했다. 민주주의가 가는 길에는 구급차나 소방차처럼 모든 것이 비켜 섰다. 민주의 외침 앞에는 어떤 잡음도 침묵했고 반민주는 불의의 대명사였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지를 시험하듯 많은 대가를 요구했다. 국민들은 숱한 피를 그 제단에 바쳤다. 마침내 6·29선언으로 천금같은 민주주의가 우리 손에 쥐어졌다.
6·29는 직접적으로는 6월항쟁이 쟁취한 것이지만 결국은 오랜 민주 투쟁의 귀결이었다. 그 선언은 군사정권의 항복문서요 그날은 전국민의 전승일이다. 크게 기념되어야 할 이 선언이 군사정권의 소산이라 하여 역사적 의미설정에 등한시될 일이 아니다.
현정권은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이름으로 오랜 군사독재 끝의 첫 민주정부로 자처하고 싶어 하지만 민주정부는 엄연히 6공과 함께 개시된 것이다. 아무리 3공이래의 정부를 한마디로 군사정부라고 싸잡아 버려도 노태우정권이 독재정권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노태우정부가 현 정부보다 더 민주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노태우정부의 6공이 「물공」이 된 것은 갑작스런 민주화의 급격한 냉온차 때문이었다. 약한 정부가 반드시 민주화 정부가 아니라는 반성에서 김영삼정부는 독선정부가 되었고 이것은 여러 면에서 탈민주적인 행태로 나타났다.
6·29선언으로 민주화의 문이 열린 것은 물론 수많은 민주투사들의 선도의 힘이 컸다. 그러나 결국 민주화를 쟁취한 것은 국민의 힘이다. 몇몇 투사의 승리가 아니라 전국민의 승리였다. 그렇다면 그 투쟁의 성과는 국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져야 할 것이다. 그 균배는 모든 국민이 민주화의 수혜자일 때 이루어진다. 과연 지금 국민들이 그 수혜자인가.
현 정권은 민주투쟁의 과실을 국민들에게 나누어주기 전에 마치 민주화가 저들만의 전리품인양 권력을 차지해 그 권력을 회식해 왔다. 난국이건 파국이건 김영삼 대통령의 오늘의 좌초는 민주투쟁의 전과를 국민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
여기서 국민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민주화 투쟁이었던가를 자문하게 된다. 그토록 많은 제물을 바치며 갈망했던 민주화의 결과가 고작 오늘의 이 혼돈이란 말인가. 그토록 아름답다 했던 민주주의의 실체가 이것이었던가. 이른바 문민정부는 민주투쟁 세력의 첫 집권이라는데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 세력이 투쟁의 대가로 권력을 쥐어서는 그 투쟁의 의미를 스스로 무색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
민주주의가 지고의 가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민주투쟁은 한 개인에게 지상의 경력이었다. 그러나 그 경력이 곧 경륜인 것은 아니다. 민주투쟁이 유일한 경력인 사람들에게 권력을 맡겼을 때의 결과를 국민은 지금 눈앞에 보고 있다. 민주투쟁의 경력이 반드시 국가발전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현정권은 탄생했다.
요즘 일각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고개를 든다. 이것은 새삼 개발독재를 생각하게 한다. 그 허기진 시절 경제건설보다 민주건설이 더 당위였을까. 경제적 기반이 다져지기 전에 민주적 욕구를 다 충족시켜 가면서 경제발전이 가능했을까. 오늘날의 이만한 경제력 없이 오늘날의 이만한 민주화가 이룩되었을까. 개발독재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끊임없는 투쟁없이 경제력만으로 민주화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 자유없이 정치적 자유는 없는 것이다.
6·29선언이후 인권 등 국민권리와 자유의 신장이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민주화만 되면 만병이 통치될 줄 알았던 기대가 배반당한 국민의 실망은 크다. 김영삼정부의 가장 큰 실정은 민주화 10년에 국민들에게 이런 좌절감을 안겨준 것이다.<본사 논설고문>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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