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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부재/염재호 고려대 교수·행정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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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부재/염재호 고려대 교수·행정학(한국논단)

입력
1997.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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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 주자들 당리당략·정권욕 앞서 역사의식·정치철학을 국민에게 보여주라누구를 찍어야 하느냐고 한다. 대권주자들은 한결같이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를 과단성있게 해결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진정 누구의 말이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TV토론이 대권주자들의 언변과 성품을 확인해 보는 계기는 되었지만 그들의 정치가로서의 철학을 확인하는 데에는 한계를 느꼈다.

이번에 선출될 대통령은 식민통치, 동족상잔, 군사독재로 얼룩진 20세기 좌절의 한국사를 마감하고 21세기 희망의 첫 장을 여는 우리의 지도자가 된다. 20세기로 진입하던 조선조 말기 역사의 대변혁 앞에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당쟁으로 나라를 잃게 한 정치지도자의 모습만이 후손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면 오늘의 대권주자들은 21세기에 후손들에게 어떻게 비쳐질까.

많은 대권주자들이 대통령으로서의 철학은 없고 정치가로서의 권력욕과 행정가로서의 정책의지만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구호 또한 구태의연한 정치적 수사의 연장이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논리는 60년대 우리를 총화단결하게 했던 경제성장과 번영의 상투적인 구호에 불과하고,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겠다는 이야기는 80년대 이후 제시된 정치적 수사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대권주자들로부터 21세기를 위한 비전과 새로운 정치철학을 기대할 수는 없는가.

아직도 지역주의, 당내 파벌, 인물중심의 비민주적 정당체제와 같은 20세기 유산들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21세기까지 끌고 가려는 지도자들 뿐인 것으로 비쳐지기에 대권주자들의 행보를 국민들은 근심어린 눈으로 지켜볼 뿐이다. 현재 우리의 상황을 국가적 위기로 해석하고 정경유착의 근절, 교통문제, 수출부진, 산업구조조정 등의 단기적 과제들을 모두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장기적 미래에 대해 젊은 유권자들에게 들려주는 단 한마디의 철학은 결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정보혁명, 통일, 고령화사회, 국제경쟁의 강화, 삶의 질과 같은 교과서적인 미래의 전망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한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미국 상무부에서 발표한 보고서는 21세기 초반에 한국이 세계 7대 경제대국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난 30여년간 매년 경제위기라고 하지 않은 적이 없었을 정도로 경제문제에만 매달려온 우리로서는 이제 21세기에는 경제만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내세울만한 문화와 철학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졸부의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아들이 방탕한 생활로 손가락질 받는 것을 피해야하는 것처럼, 21세기 한국의 후손들이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인정받는가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더욱 절실할지 모른다. 옌볜(연변)동포 사기사건, 외국인근로자들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는 보신관광 등은 경제위기보다 더욱 심각한 문화와 철학의 위기로 21세기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한국은 21세기에 국제사회에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경제력에 걸맞은 이념이나 사상, 또는 철학이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는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은 최소한 역사의식과 정치철학, 미래에 대한 비전을 당리당략과 정권욕에 앞서 국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또한 정치적 실리보다는 큰 걸음으로 걷고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앙드레 말로의 묘역 이전 행사장에서 프랑스의 문화적 자존심을 연설하는 시라크 대통령의 모습을 볼 때 정치는 상징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들로 하여금 꿈의 미래를 믿게 해주고,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것만큼 힘있고, 멋있는 정치는 없다. 삶의 질의 향상은 국민총생산(GNP)이나 정부의 복지예산이 증대된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나 세끼 밥먹는 것보다 더 의미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철학과 문화의 비전을 통해 가능해진다.

또 다시 싸우고 야단치고, 과거의 모든 죄를 마치 국민들이 짊어져야 하는 것처럼 정좌하고 군림하는 지도자만을 모셔야 하는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희망의 정치를 보여주는 지도자는 없는가? 21세기를 여는 대통령으로서 최소한 우리의 미래에 대해 하나의 철학을 갖고 있는 지도자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대권주자들에게 선거참모중에 철학자나 사상가가 혹시 한사람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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