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근본주의자 「탈리반(Taliban)」의 지배가 확대되면서 기득권세력인 지방군벌의 대항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에 빠져있다. 구소련에 저항할 때에는 그처럼 단결되어 항쟁했던 그들이 독립을 쟁취하고서는 군벌과 족벌로 갈리어 서로가 상종을 거부하면서 적이 되어 싸우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2년전 유엔인권위원회가 나를 아프가니스탄 특별보고관으로 선임했을 때 한국전쟁의 처절한 상황 속에서 국제사회가 베풀어준 은혜에 보답해야 하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다가왔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군벌들은 평화협상에는 소극적이면서도 밖으로는 「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전쟁명분에 몰두해 있었고 개인의 인권상황을 유례없는 극한상태로 몰고 가면서도 언제나 전체 국민의 권리보호를 내세우고 있었다. 이것이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이 그려놓은 명분과 그 그늘의 실상이었다.
아직도 이웃 파키스탄과 이란에 머물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난민은 300만명을 웃돈다. 유엔의 인도적 지원을 받아 귀국하였던 난민들에게는 항상 포탄과 지뢰밭, 교육과 직업의 기회가 사라진 사회, 약탈과 가혹행위와 기아만이 기다리는 고향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유엔의 고귀한 인도주의가 「비인도적 지원」이었다는 비난을 받는 허무한 순간이 되기도 했다.
탈리반은 모든 여성의 교육과 직업을 박탈하였고 외출까지도 금지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을 중세 이전의 사회로 회귀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성을 한층 보호하는 이슬람전통과 율법을 명분으로 하여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다.
한편 국제사회는 이러한 인권침해는 묵과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명분아래 식량지원을 중단하였다. 또 구호식량의 60%가 지배층 몫이나 군량미로 전용된다는 의심도 지원중단의 설득력을 보강하였다. 여기에서도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인권은 근본적으로 박탈된 채 방치되었으며 유엔의 제재는 주민들을 더욱 곤경에 빠지게 하였다는 그늘만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험은 우리의 현실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민주사회에서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이념은 사상의 상대성을 수용하는 지혜일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기호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공존하는 사회말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항상 다수자의 우월적인 위치를 정당화하는 지배원리라고 착각하여, 허상에 사로잡혀 있는 지도자들을 흔히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일단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은 독재자처럼 행동하여도 다수를 대변하는 것으로 위장된다.
이해가 맞는 일이라면 정치가들이 가장 의존하기를 즐기는 편리한 논변이 「국민의 뜻」이다. 각기 다른 주장을 하면서도 각자가 국민의 뜻이라고 강변하는데 그치지 말고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국민들도 살고 있음을 생각하자.
다수자는 구태여 힘있는 자가 대변해 주지 않더라도 소수자들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자신의 이익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사회가 민주적 지도자에게 거는 기대는 다수자를 대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존할 수 있도록 소수자를 보호하는데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북한동포의 처참한 실태를 알면서도 우리의 대북정책이 김정일과 지배층을 겨냥한 대책에 역점을 둘 수 밖에 없다는 현실에도 충분한 명분은 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험처럼 북한동포들도 그 지배층과 국제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이중고를 겪는 그늘로 남지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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