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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안정효 소설가(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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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안정효 소설가(아침을 열며)

입력
1997.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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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이름은 윤아지였고, 고령 김씨였던 외할아버지가 일제시대 창씨개명때 가네마쓰(금송)가 되니 외할머니는 영락없이 금송아지였다.금송아지 할머니는 생활력이 강했다. 『한강물이 마르면 말랐지 내 호주머니 돈은 마르지 않는다』고 하셨던 외할머니가 20년 전 세상을 떠나시고 난 다음 어머니는 금송아지 할머니한테 못갚은 돈이 있다고 그러셨다.

한국전쟁때는 우리 집안도 이산가족이 되었고 나는 어머니, 세 동생과 함께 외할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전쟁을 치렀다. 1·4후퇴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걸어서 피란을 갔지만 세 동생을 업고 먼길을 갈 수가 없어서 여동생 하나를 눈벌판에 버렸다가 결국 되찾은 다음 우리는 안양부근에서 되돌아 올라와 지금은 부천시가 된 소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공산치하에서 할머니는 어머니와 함께 인민군을 위해 밥을 해주는 삯으로 누룽지를 얻어다 햇볕에 말려두고는 겨우내 끓여 누룽밥을 해먹었다. 그리고는 유엔군이 돌아오자 이번에는 국군의 밥당번을 해서 누룽지로 우리들을 먹여 살렸다. 이데올로기가 어떻고 적과 아군이 어떻든 간에 어쨌든 할머니는 군인들에게 밥을 해주면서 우리들이 전쟁중에 단 한끼도 굶지 않도록 세심히 보살펴 주었다.

지금은 부천시로 편입됐겠지만 것저리라는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호미 하나로 집 뒤 언덕에다 방공호를 파서 두더지처럼 우리들을 보호했던 분도 금송아지할머니였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소사역의 곡물창고가 유엔군의 폭격을 맞아 쌀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을 알고는 어머니와 함께 포탄의 위험을 무릅쓰고 폭격맞은 농협창고에서 쌀을 구해다 밥을 해서 우리들을 먹였다. 공습동안 쌀을 가지러 소사역(현재 부천전철역)으로 갈 때면 우리 4남매를 위해서 누가 집에 남고 누가 목숨을 걸고 쌀을 가지러 가느냐를 놓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늘 다투었고, 결국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아무도 양보하지를 않아 늘 둘이서 같이 다녔다.

할머니는 부평의 「양공주」들을 상대로 보따리 옷장사도 하셨다. 옛날 할머니치고는 드물게 언문을 다 깨쳤던 할머니는 옷감을 떼다가 집에서 가격표를 만들어 가지고 나가셨다. 물론 비싼 「바가지요금」가격표였지만 할머니는 양공주들이 『할머니 이 유통하구 비로도 얼마예요』라고 물으면 『나 무식해서 잘 몰러. 이 쪽지에 옷가게에서 얼마 받으라고 적어 주었는데 그대로 받으면 돼』라면서 당신이 직접 만드신 가격표를 내놓았고 부평의 양공주들은 할머니가 바가지를 씌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옷장사를 하면서 돈을 아끼느라고 할머니는 밥을 굶고 날마다 오징어 한마리를 씹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치아를 모두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며칠 장사를 나갔다 돌아올 때마다 방바닥에 수북하게 쏟아놓던 돈더미가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할머니는 날마다 노라노예식장으로 가서 하객으로 가장하고 결혼식이 열릴 때마다 답례품 찹쌀떡을 받아 가지고 나와서는 서대문 전차정거장에 나가 팔아 돈을 만들었으며 남는 찹쌀떡은 가져다 우리에게 먹였다.

금송아지 외할머니는 나중에 내가 쓴 중편소설 「솜바지」에 등장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나는 한국전쟁을 생각할 때면 손수 작성한 바가지 가격표와 부천역의 쌀창고와 것저리의 방공호처럼 할머니와 관련된 장면들이 머리에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전쟁을 이겨낸 여인의 끈질긴 생명력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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