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과 부침의 36년김종필 자민련총재의 인생역정은 순응과 도전, 좌절과 재기로 요약된다. 35세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을 주도한 뒤 36년동안 권력의 정점에서 영욕과 부침이 교직하는 세월을 보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과 최장수 총리(71∼75년)를 역임한 그는 민주공화당, 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 등 여야정당을 함께 이끌어온 8선의원. 87년 대선에 도전했다 실패한데 이어 이번에 또다시 대권문을 두드리게 됐다.
1926년 충남 부여출생인 김총재는 49년 1월 육사 8기생으로 입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본부 정보국에 첫 부임, 박 전대통령과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박 전대통령의 조카로 부인인 박영옥 여사는 이때 만났다. 4·19직후 정군운동을 주도하다 두차례 투옥끝에 강제예편 당한뒤 석달만에 5·16을 주도한다.
박정희집권 18년동안 그는 온갖 풍상을 겪는다. 첫 시련의 화근은 공화당 창당을 둘러싼 혁명주체세력 내부의 갈등. 5·16 이듬해 공화당 창당을 극비리에 추진하다 반김종필계열의 반발로 63년 「자의반 타의반」 1차 외유를 떠난다. 63년 한일국교정상화의 최대걸림돌이던 대일청구권문제를 협상하다 6·3사태에 직면, 6개월동안 2차 외유에 오른다.
75년 12월 총리직에서 물러나 권력핵심에서 떨어져 있는 그에게 10·26이 운명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서울의 봄도 잠깐, 5·17직후 계엄사에 붙들려가 50여일동안 감금되고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몰수당하는 치욕을 겪는다.
미국에 가있던 그는 86년 귀국, 87년 10월 정치재개를 선언한다. 이후 김총재는 세번의 결단을 내린다. 하나는 87년 신민주공화당 창당과 대선출마. 또다른 하나는 90년 1월의 3당합당. 마지막 하나는 민자당탈당과 자민련창당이다. 김총재는 자민련 창당 석달만인 95년 6·27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키는 성과를 거뒀고, 창당 1년만에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도 50석을 얻는 약진을 일궈냈다.
내각제 실현을 정치의 마지막 목표로 삼고 있는 김총재는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마일이 있다』는 프로스트의 시구를 자주 인용, 현실정치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김성호 기자>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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