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아픔 ‘역사’로 되살려내캄보디아 프놈펜에 망각속에 생존해 왔던 「훈」할머니의 인생은 드라마보다 더 혹독한 민족의 역사이다. 군대위안부로 끌려간 20여만명 중 대부분은 어딘지도 모르는 타국에서 죽어갔거나 이렇게 잊혀져 왔다. 지난 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결성되면서 비로소 일본의 만행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정부차원의 사과와 배상을 거부하고 전쟁범죄를 「돈문제」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군대위안부 문제는 비록 50여년전에 있었던 것이지만 최근에서야 범죄사실과 그 주범이 드러난 만큼 결코 과거가 아닌 오늘의 문제이다』 90년 11월 여성단체연합 교회여성연합회 등 19개 단체가 결성한 정대협은 군대위안부 할머니의 개인적인 아픔을 「역사」로 되살려 냈다.
참여단체가 24개로 늘어난 정대협의 6년여 활동은 ▲일본정부에 공식적인 사과와 피해배상 압력 ▲한국정부의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법제정 운동 ▲군대위안부 범죄에 대한 유엔 차원의 국제공조 ▲피해 할머니들의 생활보호 등이다.
정대협은 「신고전화」를 개설해 생존자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각종 자료를 수집, 군대위안부가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명백하고도 조직적인 범죄란 점을 규명해냈다. 정대협은 수시로 증언집회를 갖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269회째 수요정기시위를 벌이는 한편, 일본의 양심적인 NGO와 연대해 일본정부에 공식사과와 피해자배상 압력을 넣었다. 93년 8월 일본정부는 군대위안부 모집이 민간업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당초 입장에서 『강제성을 띠었다』고 한발짝 물러났다.
우리 정부에도 진상조사와 피해배상 요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91년 7월 실무대책반이 조직돼 진상조사가 시작됐으며 95년 5월에는 「군대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정대협은 92년 유엔인권위원회에서 군대위안부를 전쟁범죄로 다룰 것을 호소, 필리핀 인도 등 다른 피해국가들과 함께 「군대위안부의 성적 착취는 처벌시효가 없는 반인륜적 범죄」라는 유엔의 공식입장을 받아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지난해 일본정부의 법적책임을 인정, 책임자 처벌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냈다.
군대위안부 생존자에 대한 지원활동으로 92년엔 「정신대할머니 생활기금 국민운동본부」를 조직, 이듬해 생활형편이 어려운 할머니 62명에게 250만원씩의 생활비를 지원했다. 불교계와 함께 경기 광주에 「나눔의 집」을 만들어 오갈데 없는 군대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보금자리도 마련해 주고 있다.<정덕상 기자>정덕상>
◎북 ‘종태위’도 진상규명 활발/일 만행 입증자료 폭로/위안부 34명 증언도
여성을 성의 노예로 전락시킨 일제의 만행은 한반도뿐아니라 필리핀 인도 대만 등 동남아시아전역에서 자행됐다. 이에따라 「군대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책임있는 배상」을 촉구하는 각국 NGO들의 목소리도 한결같다.
북한도 식민지통치 아래서 자행된 일본 범죄의 중요한 대목으로 군대위안부를 다루고 있다. 북한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NGO는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종태위). 북한은 일제 식민통치의 비합법성을 규명하고 피해보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권고안과 의견서를 작성할 목적으로 92년 5월 상설기구로 「일제의 조선강점피해 조사위원회」를 창설했고, 종태위는 이 위원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종태위는 92년부터 범죄 진상조사에 착수, 군대위안부 할머니 131명의 신고를 받았다. 93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서 종태위는 군대위안부는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조직적인 범죄임을 입증하는 자료를 폭로하고 군대위안부 할머니 34명의 공개증언을 통해 각국의 호응을 받았다.
95년 중국 베이징(북경)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대회 NGO포럼에서 종태위는 정대협과 공동결의문을 채택, 『일본이 민간기금안을 고집할 경우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적극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남북한은 결의문에서 ▲전세계여성들이 아시아 민간단체의 이같은 행동에 동참 ▲전쟁중 여성에 대한 폭력행위를 처벌 ▲여성인권보호를 위한 국제적 연대 등을 촉구했다.<이동훈 기자>이동훈>
◎일 지식인들 사이 ‘양심의 목소리’/국가배상·자료공개 촉구
『일본 정치인들이 불행한 역사에 대해 사죄를 않기 때문에 연극인들이 나서 사죄를 해야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14살때 군대위안부로 끌려간 한 소녀의 삶을 통해 질곡의 역사를 되돌아 본 연극 「거짓말쟁이 여자, 영자」의 연출가 후지다 아사아(등전조야·63)씨가 95년 밝힌 방한소감은 위안부에 대한 일본내의 두 얼굴을 극명하게 비춰주었다.
정부와 우익단체들의 「정부보상 불가」입장에도 불구, 「전후보상 캠페인」 「전쟁책임자료 센터」 「여성전쟁 인권학회」 등 양심적인 NGO들은 『일본은 군대위안부를 전쟁범죄로 인정하고 국가차원에서 배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은 특히 『진정한 과거청산만이 아시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며 군대위안부에 대한 자료공개를 촉구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군대위안부를 「동정」차원에서 해결하려는 자국 정부의 태도를 비난하는 의견이 많다. 지난해 5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의 대표역을 맡았던 미키 무쓰코(삼목목자)씨가 『국가보상을 피하려는 정부에 이용당하고 있다』며 대표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일부 의원들은 입법을 통해 사과와 배상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판 「40대 기수론」을 주창하고 있는 하토야마 유키오(구산유기부) 의원 등은 『상대국이 청구권을 방기했다고 해서 일본정부의 보상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며 자각있는 의원들의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다.<김동국 기자>김동국>
◎정대협 윤정옥 공동대표/“동시대인의 고통 외면못해”/일 금전적 동정아닌 진실한 사과 있어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정옥(72) 공동대표는 군대위안부 할머니들과 동시대인이다. 윤대표는 아무도 돌보지 않던 군대위안부 할머니들에게 30여년간 매달린 이유를 『동시대인의 고통을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물론 우리 정부 마저도 외면해왔던 할머니들의 고통은 윤대표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동남아 전역으로 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은 10대 「조선처녀」를 무차별적으로 끌고 갔다. 이화여전 영문학부 1학년에 재학중이던 윤대표에게도 군대위안부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43년 일본군은 학교 지하실에 전교생을 모아 놓고 국민총동원령에 손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했다』며 『어쩔 수 없이 손도장을 찍었지만 수치감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어 바로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다.
미국과 영국을 유학, 58년부터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군대위안부의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 윤대표는 역사나 사회학자들에 의해 그때의 사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세월은 일제의 만행을 묻어만 갔다.
70년대말 윤대표는 직접 나섰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군대위안부 출신들을 수소문하고, 증언을 듣고, 각종 사료를 뒤졌다. 인도 대만 태국 미얀마 등 위안소가 있던 곳을 찾아가 조선처녀들의 흔적을 캤다. 80년에는 일본에서 죽은듯 살고 있는 배봉기 할머니를 찾아내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90년 5월 윤대표는 한·일 정상회담에 앞서 군대위안부에 대해 양국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하고 나섰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우리정부도 군대위안부 범죄를 일본에 외교문제로 제기했으며 여성관련단체들도 정신대할머니 돕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30여년 가까운 윤대표의 활동도 일본의 성의없는 태도로 아직은 메아리에 그치고 있다. 『일본은 정신대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군대위안부의 만행이 잊혀지질 원하고 있다』는 윤대표는 『꽃다운 청춘을 짓밟히고 환갑을 훨씬 넘긴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민간기금 등의 금전적 동정이 아니라 일본정부의 진실된 사과와 법적 보상』이라고 강조했다.<정덕상 기자>정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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