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6월25일 장마철 시작을 알리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날 춘천시 죽림동 하숙집에서 아침 일찍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비내리는 가운데 포성이 은은히 울려오고 있었다. 북한군의 포성이었으나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군 제27포병대대의 1개포대가 춘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일요일인데도 새벽 사격훈련을 하고 있는가 보다 하고 포성을 무심히 흘려 보냈다.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설치된 것은 47년 11월14일이었다. 이날 유엔총회에서는 한반도 총선거안,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설치안, 정부독립후 한반도에서의 미·소양군철수안을 가결시켰다. 이에 따라 인도의 메논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구성되었다. 이 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48년 1월8일이었다. 그해 1월 12일 메논 단장은 평양측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요청했으나 북한주둔 소련군사령관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인 김일성은 『유엔한국임시위원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입북을 정식으로 거부했다.
이북에서는 48년 9월9일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소련군은 북한에서 철수했다. 이로부터 약 2년후인 50년 6월7일 북한의 김일성 수상은 남북총선거를 제의해왔고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입북절차를 준비하는 등 남북평화통일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 사람들의 마음은 들떠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6월25일 아침 8시30분께 나는 군복위에 우의를 입고 긴 고무장화를 신고 춘천도서관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춘천공화당 앞에 이르렀을 때 제7연대 제1대대장이 급파한 제1중대연락병을 만났다. 나는 그 때 제1중대 중대장이었다. 북한군이 남침을 해서 비상소집한다는 급보였다.
대대본부로 달려갔더니 대대장은 북한군이 38선을 돌파하고 이미 8㎞나 남하하여 춘천시에 육박하고 있다는 상황설명과 동시에 제1중대의 우두산으로의 출동을 명령했다.
나는 제1중대본부로 뛰어가서 중대출동준비를 명령하고 부리나케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철모를 썼으나 군화가 문제였다. 하숙집에 벗어놓고 고무장화를 신고왔기 때문이다. 중대보급창고에 있는 군화들 중에서 골라 신으려 했으나 모두 작아서 못 신고 다급한 김에 방한화를 하나 골라 신었다. 그리고 칼빈소총을 둘러메고 실탄을 탄대에 넣은 후 1중대 장병을 이끌고 우두산에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리고 압록강까지 진격, 처음으로 물을 마시는 감격도 맛보았다. 하지만 3년 1개월간 계속된 이 전쟁은 우리겨레의 선혈 수천톤을 빼앗으며 우리역사상 가장 피해가 큰 전쟁기록을 남겼다.
세월은 흘러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47돌이 지나는 동안 모든 분야에서 북한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북한에서는 자유가 사라진 데다가 먹을 것도 메마른 극빈의 지옥으로 전락했다. 탐염의 악인으로 불길에 타는 듯한 번뇌의 악과에 시달리던 소위 김일성 어버이수령은 가슴이 답답함을 호소하면서 94년 7월8일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북한체제는 21세기의 정보화시대를 극복할 수가 없으며 반드시 붕괴하고 말 것이다. 북한의 성전인 조선노동당규약과 유일사상체제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을 읽어보면 그 해답이 명확해진다.
그러나 현재 북한의 군사력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은 남한의 친북소요사태가 전국적이고 효과적일 때 김정일이 오판하고 제2의 한국전쟁을 일으킬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깨끗하고 맑고 큰 정치를 할 때 북한은 전쟁을 일으킬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침을 한다면 한미연합군에 의해 북한은 궁극적으로 패망하고 김정일 자신도 죽을텐데 그러한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제2의 6·25가 일어나고 안 일어나는 열쇠는 김정일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치지도자들과 국민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새삼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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