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전쟁의 상처/김이영 한양대 의대 교수(화요세평)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전쟁의 상처/김이영 한양대 의대 교수(화요세평)

입력
1997.06.24 00:00
0 0

◎몇사람의 광기로 시작/전쟁에 책임없는 보통사람들을 죽이는 비극을 또 겪을순 없다개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전쟁은 일어나지만 전쟁의 체험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전쟁을 겪어도 전쟁의 경험은 개인마다 다르다. 전쟁이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인생관의 변화에 이르기까지―은 독특할 수 밖에 없다.

6·25가 터진 며칠 후에 경기 평택에 있던 아버지의 병원에는 한떼의 부상자가 들이닥쳤다. 크게 다쳐 출혈이 심한 한 청년은 아픈 것도 잊은듯 『서울을 보라. 전차가 달리고 해방의 날이 왔다. 위대한 수령동지를 환영하라. 당신들은 왜 여기서 꾸물거리고 있는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같은 트럭으로 도착했던―그들도 역시 부상당한―국군들은 약을 달래서 자기들끼리 상처를 치료하기에 바쁠뿐 그 젊은이를 제지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치료를 끝낸 그들은 『우리는 부상으로 후퇴하지만 서울에서는 국군이 이기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그 공산당 청년을 태운채 남쪽으로 갔다. 서로 마주보고 싸웠을지도 모르는 그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듯 한 차를 타고 떠났다.

얼마후 낯선 병사들, 그때 말로 「코쟁이」 병사들이 남쪽에서 오더니 집 앞을 지나 북쪽으로 갔다. 그들이 바로 한국전쟁때 우리나라에 최초로 투입된 유엔군으로 오산지역 전투에서 크게 손상된 부대였다. 우리는 그들을 믿고 『이제는 피란 걱정은 안해도 되겠구나』라며 싸놓았던 피란 짐을 풀기도 했다. 착각이었다.

며칠 후 집에서 200m쯤 떨어진 철로에 무기를 실은 화물기관차들이 서있었는데 별안간 비행기 몇 대가 날아왔다. 마침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한 공군장교는 『연습비행이니 걱정말라』면서 태연히 그 비행기들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그들이 내려 꽂듯이 폭격을 해대기 시작했다. 공습경보도 없었고 북의 비행기가 폭격할지도 모르니 방공대책을 세우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보통대로 학교에 다녔고 학교에서는 전쟁이 어떤 상황이니 어떻게 하라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니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차에 불이 붙고 집들도 타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우리 가족은 빈 몸으로 집을 빠져 나왔고, 그길로 지금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는 바닷가로 피란을 갔다. 석달동안 그곳에 살면서 단 한번 지나가는 인민군을 볼 수 있었을뿐 총소리 한 번 듣지 못했고, 오직 분주히 날아다니는 전투기들을 보고 아직도 전쟁중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수복후 돌아온 집은 빈터가 되어 있었다. 다시 피란을 가고, 돌아오고, 학교엘 다녔다. 어느 날부터인가 「통일 없는 휴전 결사반대」라는 피켓을 들고 초등학생 주제에 시위에 참가해야 했다. 반대하는 이유도 모르면서 수업을 제쳐놓고 길거리에 나섰다.

휴전이 되었다.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던 착하디 착했던 젊은이가 인민군이 오기도 전에 자신의 고향마을을 접수(?)해서 인민위원장을 했고, 후에 전진하는 국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사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니! 그 친구가 빨갱이였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그런가 하면 바닷가 촌구석에 있는 학생들에게 가장 열성적으로 김일성을 찬양하던 인민학교 선생이 사실은 국군과 연락이 닿아 있었던 비밀요원임도 나중에 알았다.

이렇게 나의 초등학교 시절 전쟁은 혼란스럽게 지나갔다. 그 전쟁이 무엇인지 정리하지 못한채로 세월이 흘렀다. 어른이 되어 남의 전쟁에 참여했고, 그 전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내 나라에서 겪은 전쟁도 분명하게 파악되기 시작했다.

전쟁은 몇사람의 광기로 시작하고, 전쟁에 책임을 질 의무가 없는 보통사람들은 대책없이 죽어가고, 자기가 전쟁의 주체인 것처럼 껍적대는 사람들도 사실은 교묘히 은폐된 악덕 청부업자의 하잘 것 없는 소모품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오랜 시간에 걸쳐서 깨쳤다.

내일이 6·25여서 「나의 전쟁」을 돌이켜 보았다. 다시는 전쟁을 겪고 싶지 않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