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8년 허왕후가 인도서 반입설/지금은 인근언덕 50평 밭서 겨우 명맥가락차의 자부심이었던 김해시 다전동 차밭골의 「장군차」. 도시 개발에 떠밀려 명맥이 위태롭던 이 차는 4년전 가락의 옛 궁궐터인 봉황대 동쪽 언덕 50평짜리 밭으로 자리를 옮겨 겨우 명맥은 잇고 있다. 김해 차인들의 장군차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각별하다. 차인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 사료를 들이 대며 자기 고장이 우리나라 차문화의 시원지라고 주장하게 마련이다. 김해 또한 마찬가지다.
김해 차인들은 차의 역사에 대해 정사인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사보다는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기사를 우선한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차문화가 7세기에 시작돼 9세기때 꽃피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 온 사신 대렴이 차씨를 가져 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도록 했다. 차는 이미 선덕왕(632∼646)때 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했다」
그러나 「삼국유사」중 「가락국기」에 따르면 우리나라 차문화의 시원은 이보다 500년을 더 거슬러 올라 간다. 「신라 30대 법민왕(661∼681·시호 문무왕)이 661년 가락국 수로왕은 내 15대조가 되므로 비록 나라는 망했어도 사당은 남았으니 제전을 행하도록 명을 내려 수로왕 17대손 경세급간에게 거등왕 당시와 똑같이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과 밥과 차와 과자 따위의 제수로 제전을 거르지 말고 행하도록 했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년)부터 구형왕 말기에 이르기까지 330년동안 묘의 제사는 변함이 없었으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 용삭 원년(661년)에 이르기까지 60년 사이에는 묘의 제사를 간혹 빠뜨리기도 했다」
또 이능화(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는 「김해의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로는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김해 향토문화연구소장 김종간씨가 발췌한 구전 야사는 이를 한결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수로왕비가 되고자 허황옥 공주가 인도에서 올 때 옥으로 만든 함에 차씨를 담아 와 첫밤을 새운 명월산에심도록 했다. 명월산 명월사에는 차를 담당하는 스님이 있었으며 철에 맞춰 차를 궁에 바쳤다. 이 차는 그 이름이 이웃 왜에까지 알려져 왜가 사람을 보내 차를 구해 갔다」
이런 기록과 구전을 근거로 김해 차인들은 허왕후가 김해땅에 발을 디딘 서기 48년을 가락차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한편 조선 인조(1623∼1649)때 의 「김해지」는 김해 차인들의 자부심을 부추긴다. 「차밭골의 골짜기를 금강곡이라 하는데 금강곡은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수도장이다. 고려 충렬왕(1274∼1308)이 금강골의 차나무를 보고는 수레를 멈추고 장군차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이처럼 명성이 자자해 가락차를 상징했던 「장군차」는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차츰 그 이름이 잊혀져 간다. 더욱이 82년 가락 고도 김해가 시로 승격된 후 「장군차」는 위기를 맞게 된다. 80년대말 도시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차밭골을 지나는 산복도로가 뚫리고 아파트가 잇달아 들어 섰다.
89년 12월 부산차인들을 주축으로 수로왕 위패를 모신 숭선전에서 지리산 차밭에서 딴 차로 차례를 올렸다. 이후 해마다 가락국기의 기록대로 차가 제상에 올랐다. 유구한 가락의 차맥이 되살아 나는 듯했지만 정작 「장군차」의 본향인 차밭골은 바람앞의 등불이었다.
김소장 등 김해의 차인들이 똘똘 뭉쳐 「차밭골 성역화 운동」을 시도해 보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300년이 넘은 200여 그루의 차나무가 그대로 불도저밑에 깔려 버렸다. 김해 차인들은 결국 성역화 노력에서 한 걸음 물러나 차밭을 봉황대 동쪽 언덕에 조그맣게 옮겨 「장군차」의 맥을 잇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봉황대 차밭에서 동북쪽으로 바로 보이는 차밭골 일대에서는 지금도 각종 공사가 한창이다. 2,000년 가락의 혼이 어린 유서깊은 「장군차」는 이제 봉황대에서 겨우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김해시는 시승격과 함께 시가지 동서남북을 잇고 있는 16개의 길이름을 새로 지었다. 구지로, 패총로 등 역사의 향기를 일깨우는 길이름에는 다전로라는 이름이 있다. 서상동에서 수로왕릉과 동광초등학교, 활천고개를 지나 차밭골에 이르기까지 동서로 이어진 610m의 길. 우리나라에서 차와 관련한 첫 길이름으로 김해 차인들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고 있다.<김대성 편집위원>김대성>
◎알기쉬운 차 입문/차는 냄새·습기 흡수 빨라 캔·병 등에 밀봉 보관해야
먹고 남은 찻잎은 탈취제로 사용될 만큼, 차는 다른 향기를 쉽게 빨아 들인다. 이때문에 자칫 잘못 보관하면 잡내가 밴다. 한번 잡내가 배면 본래 차맛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요즘 유통되는 차는 절반 이상이 티백형이다. 그만큼 차가 일상화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종이와 셀로판으로 만들어진 티백으로는 차맛을 오래 보관할 수 없다는 점은 잊고 있다. 차상자 포장을 뜯은 다음부터 보관은 소비자 몫이다. 외국의 경우 티백도 하나하나 진공포장을 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포장고급화로 인한 생산비 인상이나 환경문제 등을 고려할 때 군내가 안생기는 유리병이나 캔을 이용해 티백을 보관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잎의 형태로 된 차의 경우 종이통이나 양철로 된 차통속에 비닐 또는 알루미늄 포장지로 차가 보관되어 있다. 차를 개봉하자마자 2∼3등분하여 잘 밀봉하여 포장하여 두었다가 마실때마다 하나 하나 풀어 쓰도록 한다. 다시 주의해야 하지만 차의 보관에서 가장 유념하여야 할 것은 습기와 잡내이다.
보관이 소흘하였거나 장마철에 눅눅해진 차는 맑고 건조한 날을 택해 한번 덖어 준다. 비린내가 없는 철판이나 밑이 비교적 두꺼운 냄비를 가열하여 차를 뒤적여 주면서 말린다. 냄비가 과열되어 차가 타면 않된다. 차에 열기가 닿아 비교적 강한 차향기가 터져 나올 때, 찻잎을 문질어 보아 고운 가루로 부수어 지면 잘 마무리가 된 것이다. 차를 식혀 밀봉, 보관하도록 한다.
이같은 차의 성질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차가, 꽃향기를 차에 스미게 한 꽃차이다. 꽃차 계열로 잘 알려진 차가 쟈스민차이다. 우리도 매화나 찔레꽃 등 방향성이 짙은 꽃으로 꽃차를 만들 수 있다. 찔레꽃이 한창인 요즘, 차 한잔에 반쯤 핀 찔레꽃 한송이를 띄우면, 남다른 운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차 한잔에 꽃 한송이를 띄우는 일,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다. 쉽고도 어려운 일이 만드는 삶의 여백, 바로 차생활의 향기이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박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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