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역산학’ 당대 세계 최고수준/1년 365.2425일 1달 29.530593일 계산/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 대거 투입/10년만에 우리식 천문역법 완성/일·월식 계산,서울위도 측정까지세종시대의 과학·기술은 만발한 꽃이었다. 그리고 그 찬란함 뒤에는 바람에 아니 뮈게(흔들리게) 해주는 깊은 뿌리가 있었다. 그 뿌리는 바로 「이론」이었고 이론의 받침은 「천문학」이었다.
세종 14년 1432년. 대왕(당시 35세)은 지금까지 사용해온 중국의 모든 천문학 이론을 정리·개선해 우리나라에 맞는 천문·역법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래야만 일식, 월식, 혜성 출현 등 우리나라에서 관측되는 모든 천문현상을 보다 정확히 예보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천문학은 농업이 산업의 거의 전부였던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과학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의미도 컸다. 하늘의 움직임을 알아 국민에게 절기와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은 봉건시대 임금의 가장 중요한 책무였다. 더구나 출범한 지 몇십년밖에 안된 조선왕조로서는 유교적 이념에 맞게 왕실의 권위를 확고히 하려면 천문역법의 정비가 절실했다.
우선 정흠지 정초 정인지 등에게 「칠정산 내편」을 만들게 했다. 이순지와 김담에게는 「칠정산 외편」을 편찬하게 했다. 편찬 과정에서 이순지 등은 명나라에 가서 연수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 끝에 시작한 지 10년만인 세종 24년 1442년 「칠정산 내외편」이 모두 완성된다.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고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을 표준으로 한 역법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칠정이란 7개 별, 즉 해(일)와 달(월)과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을 말한다. 칠정산은 이 칠정을 중심으로 천문학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이론체계이다.
내편은 원나라 당대에 세계 최고의 과학자인 곽수경이 완성한 수시력을 서울 위도에 맞게 수정·보완한 것이다.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내편은 1년의 길이를 365.2425일로, 1달의 길이를 29.530593일로 정하는 등 매우 정확한 상수에 입각한 것으로 세차의 값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치가 유효숫자 6자리까지 현재의 값과 일치한다. 특히 서울에서 관측한 자료에 기초해 서울의 위도에 따라 계산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외편은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로 넘어온 아랍 천문학(회회력)을 소화해낸 보다 발전된 이론이다. 내편이 중국적 전통에 따라 원주를 365.25도, 1도를 100분, 1분을 100초로 잡은 데 반해 그리스 전통에 따라 원주를 360도, 1도를 60분, 1분을 60초로 한 새로운 방식이었다.
외국어대 부총장 박성래(한국과학사학회장) 교수는 5월13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주최로 열린 세종 탄신 600주년 기념 학술강연에서 『칠정산 내외편을 완성함으로써 조선조 천문역산학은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했다. 세종이 활약하던 15세기 전반기에 전세계에서 자기 나라의 일식과 월식을 제대로 계산해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아랍, 그리고 조선뿐이었다.
일본의 경우 칠정산에 해당하는, 『일본인이 만든, 일본에 맞는, 최초의 역법』 「정향력」은 우리보다 240년 후인 1682년에 등장한다. 이 역법을 만든 시부카와 하루미(삽천춘해)는 『1643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왔던 박안기가 모종의 수학적 해법을 도와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향력을 만들 수 있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고도의 천문학 이론을 몇몇 천재들의 개인적 자질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세종대의 다른 모든 과학·기술 업적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순지였다. 세종은 당당한 문과 급제자인 그에게 중인 계층의 학문인 산학(수학)을 연구하라고 특명했다. 천문학 정리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정인지를 비롯해 집현전 출신 신진기예들을 대거 투입했다. 또 중국에 유학을 보내는가 하면 일정기간 마음껏 책만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등 온갖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칠정산이나 중국의 역대 천문학 이론을 체계적·역사적으로 정리한 「제가역상집」같은 이론서는 바로 그 여름(열매)이었다.
세종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당시 최선진국인 중국은 물론 일본의 경험까지 적극 참고했다. 조선 배에 비해 일본 선박이 경쾌하고 빠르다는 사실에 주목, 조선기술 개량을 위해 노력한 사실이 「세종실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세종 27년 1445년에는 일본 기술자를 초빙, 벼슬까지 주면서 배를 만들게 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또 「사수감」을 두어 외국 선박의 특징을 비교·연구하고 전함과 선박 건조용 자재를 조달하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실용적 과학정신은 의학 발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돋보기/이순지/15세기 최고 천문학자 명성/문과급제 불구 산학서 일가 이뤄/서울위도 38도 추산에 세종 감탄
『이순지(?∼1465)는 15세기 (세계) 최고의 천문학자였다』(전상운).
장영실을 비롯한 몇 사람이 자격루같은 각종 기구 제작에 힘쓰는 동안 그는 김담(1416∼64년)과 함께 천문·역산·수학에 전념했다. 생년을 포함해 이순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순지는 어려서 병이 많아 5살때까지는 말도 못했고 주로 누워서 지냈다.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어린 시절의 위기를 넘겼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얼마간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에서 일하다가 세종 16년 1434년 경복궁에 설치된 천문대 관측책임자로 임명되면서 세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된다. 그가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지낼 때까지만 쉬게 해달라고 했으나 세종은 정4품 무관직인 호군으로 승진시켜 연구를 계속하도록 했을 정도다. 이런 일화도 있다. 과거에 급제한 얼마후 이순지는 서울의 위도가 38도 남짓이라고 추산한 일이 있다. 세종은 그의 계산이 꼭맞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나중에 중국에서 들여온 천문학책에 『고려 서울의 위도는 38도 남짓』이라는 기록을 보고 그의 식견에 경탄했다는 것이다. 지금과 약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에는 원주를 365.25도로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지는 당대 수학의 최고봉으로 세금부과를 위한 농지측량 사업(양전)에도 중요한 이론적 자문을 맡았다. 그는 이후 동부승지를 거쳐 세종 사후에는 호조참의,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조도 그에게 의견을 많이 구했다.
◎세종어록
『수학은… 국가행정에는 필수적인 기술이다. 역대 왕조가 모두 수학을 중시한 것은 이때문이다. 정자나 주자같은 선현이 수학에 전심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이같은 점을 통찰하고 있었을 것이다. 최근 농지를 등급별로 측량하는 데 있어 이순지 김담 등의 활약이 없었다면 그 셈을 능히 해낼 수 있었겠는가? 널리 수학을 익히게 하는 방안을 강구하라』(세종실록 25년 11월17일조).
『사관은 마땅히 한 시대의 자취를 모두 기록하여 뒷세상에 보여야 한다. 임금된 자가 어찌 사관으로 하여금 좋은 것은 기록하게 하고, 좋지 않은 것은 기록하지 못하게 하겠는가』(실록 11년 4월9일조).<이광일 기자·제자 안상수 교수(홍익대)>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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