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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50년­훈 할머니 가시밭길 인생:5·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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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50년­훈 할머니 가시밭길 인생:5·끝

입력
1997.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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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놀이 따라하며 “하하” 웃음/“50년만에 본 한국여자 자고가면 안되겠나…” 정 표시/혜진 스님이 준 염주 향내 맡으며 이내 곤한잠「훈」할머니와 보낸 하룻밤은 짧고도 길었다. 할머니의 잃어버린 50여년전 기억을 수렁속에서 건져올리기에는 하룻밤은 너무 짧았다. 하지만 손을 잡고 누워 깊은 상념에 젖은 채 새벽녘까지 전전반측했던 그 밤은 할머니에게도, 기자에게도 무척이나 길게만 느껴졌다.

『오늘밤 나와 함께 자고 가면 안되겠느냐』 훈 할머니가 한참동안 망설이다 어렵사리 이 말을 꺼낸 것은 16일 저녁. 기자와의 단독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고, 다다쿠마 쓰토무(지웅력)를 만나기전 1주일여동안 3∼5명의 일본군과 동침했다』고 증언한 후였다. 증언후 설움이 복받치는듯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어쩔줄 모르던 할머니는 기자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고향땅을 떠나 이곳 캄보디아에서 홀로 살아오는 동안 당신은 내가 만난 첫 한국여자입니다』

14일 밤 프놈펜에 도착, 훈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도 할머니는 기자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똑같은 말을 건넸었다. 사실 할머니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은 서울서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기자가 줄곧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기사를 서울에 송고하고 보충취재를 하느라 매일밤 자정을 넘겨 잠자리에 들어야 했던 사정때문에 미처 말을 꺼내지 못했고 할머니의 제의가 있은 지 이틀이 지난 18일 밤 8시30분께 기자는 할머니가 머물고 있는 한국인 사업가 황기연(43)씨 집으로 갔다. 할머니와 셋째 외손녀 잔니카(19·고교생)양과 셋이서 마주앉았다. 잔니카는 영어를 좀 할 줄 알고 황씨로부터 한국말을 조금 배워 몇마디쯤은 떠듬떠듬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속깊은 얘기를 나누기에는 잔니카의 통역은 힘에 부쳤다.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을 다할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하던 기자는 우리네 여자들이 즐겼던 놀이를 해보기로 했다. 맥주병 뚜껑 2개를 모아 「공기놀이」를 해보였다. 공깃돌을 하나 손에 쥔 채 공중에서 떨어지는 공깃돌을 받아내는 놀이였다. 다음은 손바닥에 쥔 공깃돌을 띄워 손등에 올린 뒤 다시 공중에 띄워올려 잽싸게 손바닥으로 잡는 동작을 시범했다. 여자아이들이 즐기던 공기놀이에서 가장 「고난도」라 할 수 있는 일명 「꺾기」동작이었다.

공기놀이는 캄보디아에서는 없는 게임. 할머니의 국적이 한국임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기자를 보던 할머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내려앉아 뚜껑을 쥐고 그대로 따라했다. 어려운 「꺾기」까지 완벽한 동작이었다. 할머니는 『하하』하며 기분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할머니가 소리내어 웃는 모습은 이때가 처음인듯 하다. 늘 엷은 미소만을 띠던 얼굴에 더해진 웃음소리는 다소 어색하던 분위기를 금세 풀어놓았다. 이어 「가위 바위 보」놀이도 하고, 서로 마주보고 앉아 노랫가락에 맞춰 손바닥을 부딪치는 놀이도 했다.

1시간여쯤 손짓 발짓을 해가며 대화를 나누다보니 할머니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자가 프놈펜에 첫발을 디뎠던 14일밤 만났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외손녀들과 조용한 시골마을서 평온하게 지내던 고령의 할머니에게 하루 두차례씩의 인터뷰와 잇따라 찾아드는 기자들을 맞는 일은 무척 버거워 보였다. 할머니는 며칠전 복통을 일으켜 설사를 하기도 했다.

기자는 할머니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자신을 찾아다니며 같은 질문을 하면서 괴롭힌 낯선 여자이건만, 할머니는 기자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가슴이 찡해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는 이날 캄보디아에 날아온 조계종 「나눔의 집」 원장 혜진 스님이 낮에 준 향나무로 만든 염주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염주의 향내를 맡는가 싶더니 이내 두눈을 감고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가끔씩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할머니의 잠든 모습을 본 기자는 그동안 쌓인 피로로 몸은 피곤했으나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할머니를 꼭 고향으로 보내드려야 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할머니, 힘드시죠. 그래도 할머니 가족을 찾아드리고 고향에 모셔가려는 것이니 조금만 참으세요』<프놈펜=이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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