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중에 부른 “남선아…”/어머니 생존 듣고는 “부처님 감사합니다”/사진 보이자 “내고향 맞다” 이곳저곳 설명54년에 걸친 망각의 세월을 되살려 내는 일은 참으로 어려웠다. 「훈」할머니는 18일 『어머니가 살아계시다』는 서울로부터의 소식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부처님, 감사합니다』라며 합장부터 했다. 할머니는 『내가 고향을 떠날때 30대였던 어머니는 얼굴이 예뻤다. 아버지와 가끔 싸움을 하시기는 했지만 큰소리 내는 법은 없었다. 참 인내심 깊은 분이었다』고 말했다.
기자는 혈육에 대한 정이 무엇보다 할머니의 기억을 되살리는 기폭제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기자는 16일 하오부터 훈 할머니와 큰 외손녀 시나양, 통역 등 3명과 함께 할머니 가족에 대한 본격적인 확인작업을 벌여왔다.
『김남아』 『김남선』 『김남아』 『김남선』
훈 할머니는 기자가 불러주는 이름을 몇차례 따라 되뇌더니 이내 『김남선아』라고 읊조렸다. 낯선 두 이름이 혼동돼 한데 뭉쳐 발음해 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곧이어 할머니는 『남선아』 『남선아』하고 연거푸 외쳤다. 기자는 움찔했다. 이름에 「아」 「야」를 붙여 부르는 우리식 호칭을 할머니는 무의식중에 내뱉은 것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불러보는 일이야 별로 없을 터이니 「남선」은 여동생 이름이었을 것으로 짐작됐다.
할머니는 『둘중 어느것이 내 이름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중 하나가 할머니 이름인 것은 확실한가』하고 기자는 다그쳐 물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 듯한 밝은 표정으로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매우 귀에 익은 이름임에는 틀림없다』고 대답했다.
이어 할머니의 아버지가 면사무소 직원이었던 게 아니라 큰 어장을 경영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면사무소 직원으로 기억한다. 일본인들과의 접촉이 많았고 그들은 아버지를 「가와리」라고 불렀었다. 어장을 경영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매일 아침마다 강(바닷)가에 나갔었다』고 말했다. 또 할머니가 언니라고 기억하는 사람이 혹시 사촌언니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사촌언니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어릴적부터 함께 살았고 어머니가 「언니」라고 부르라 했다』고 대답했다.
기자는 할머니에게 고향 마을의 약도를 보여줬다. 바닷가에서 이어지는 작은 시내가 마을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대뜸 『시내 오른편에 자리잡은 마을 한가운데로 또 작은 시내가 흘렀는데 이를 사이에 두고 서촌과 동촌으로 나뉘었고 나는 서촌에 살았다』고 말했다. 이어 해변곁의 송림, 마을 오른편의 고갯길, 면사무소, 시장, 학교 등의 위치가 모두 맞다고 했다. 할머니는 『맛좋은 샘물이 있는 냉천사라는 절은 산 위의 높지만 평평한 곳에 있어 마을에서 바라다 보였다』고 말했다. 또 『소나무가 많아 어린아이들은 바닥에 떨어진 솔가지와 방울을 주워 땔감용으로 집으로 지어 나르곤했다』고 기억했다. 할머니는 『내 고향 마을이 맞아』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17일 이른 아침 또다시 할머니와의 「기억찾기」작업을 계속했다. 서울서 전송받은 몇장의 사진을 컴퓨터 화상에 띄워 할머니에게 보였다. 첫번째 마을의 전경사진이 뜨자 할머니는 기자를 제쳐두고 외손녀 시나양에게 마을의 이곳 저곳을 가리키며 신이 난 듯 이야기를 했다. 고향 마을이 맞다는 것이었다. 다음은 다니던 초등학교 전경. 할머니는 이제 『맞다』는 말도 생략한 채 학교 오른쪽 윗부분에 살짝 모습을 드러낸 나무를 가리키며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빨갛게 물들었다』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초등학교 졸업사진도 보여줬다. 노안으로 희미한 사진을 살펴보던 할머니는 앞줄의 선생님들중 맨 오른쪽 분을 가리키며 『한국인 선생님같다』고 말했다. 또 선생님들의 왼쪽으로 붙어 앉은 여학생을 가리키며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이 친구와 자매처럼 지내 한 방에서 자면서 뜨개질, 바느질 등도 함께했다』고 말했다.
고향마을의 전경과 옛 동무들의 얼굴을 대했기 때문일까. 할머니는 드디어 『어머니가 아프니 빨리 돌아오라』는 편지를 두번씩이나 이 먼곳까지 보냈던 남동생의 이름 「김남조」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프놈펜=이희정 기자>프놈펜=이희정>
◎부산가족 표정/“내 딸이 살아있다니…”/98세 노모 말잇지 못하고 눈물만 글썽
○…「훈」할머니의 친어머니인 유문애(98)씨는 『장례까지 치른 내 딸이 살아 있었다니…』라며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백수를 앞둔 유씨는 18일 상오 부산 부산진구 당감동 삼익아파트 둘째아들 김정일(60)씨 집에서 신문에 난 「훈」할머니의 사진을 보고 자신의 큰 딸 김남아(75)씨임을 확인하고 『그때 남아 외에도 한동네에 살던 쌍둥이 자매도 함께 정신대에 끌려갔다』고 증언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훈」할머니의 바로 밑 동생인 남선(72)씨는 『처음 신문에 날때까지 언니인줄 몰랐는데 15일 한국일보에 크게 난 사진을 보고 알았다』면서 『나도 정신대에 끌려갈까봐 1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일찍 시집을 보냈다』고 말했다.
남선씨는 『그러나 언니에 대한 기억이라곤 12, 13세때쯤 경찰이 종이쪽지를 가지고 와 아버지가 손도장을 찍었으며 며칠뒤 언니가 「데이신타이」(정신대)로 끌려갔다는 소리를 들은게 고작』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또 『언니가 만일 돌아온다면 생존해 있는 형제들이 당연히 반갑게 맞이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동안 언니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훈」할머니의 국내가족에 대한 기사와 사진이 한국일보를 통해 단독 보도되자 「훈」할머니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부산 남구 대연동 삼익아파트, 금정구 부곡동 가나빌라 주변은 18일 새벽부터 취재진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특히 17일 한국일보에 「훈」할머니의 과거상황을 뚜렷이 증언해준 남조 남선 남매는 18일 아침부터 자신들의 집에 취재진이 대거 몰려 이웃들에게 불편을 줄 것을 우려, 친척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일부 취재진들이 소재파악에 애를 먹기도 했다.<부산·진동=박상준·목상균·한창만 기자>부산·진동=박상준·목상균·한창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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