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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의 사회적 책임/구중서 수원대 교수(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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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의 사회적 책임/구중서 수원대 교수(아침을 열며)

입력
1997.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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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에 어느 체육과 교수가 나에게 말했다. 『문제가 많은 사회현실을 개혁하는데엔 국문과의 책임이 크다』고. 얼핏 느끼기엔 고리타분하고 무기력한 국문과에 그렇게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에게 영향을 주고 계몽을 하는 말과 글을 구사하는 데에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국문과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뒤로 나는 국문과 학생들에게 가끔 『국문과에 책임이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지난 시대 나라의 운명이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있을 때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거리에서 연설을 하면 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남강 이승훈도 그 대중 속에서 도산의 연설을 듣고 깨달은 바 있어 서울로 나들이 가던 발걸음을 고향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정신의 요람이 되게 했다. 지금은 그러한 민중의 지도자도 웅변가도 드문 세상이다. 그러니까 국문과에 계몽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어느 술자리에서 공과대출신으로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친구가 역시 우리사회의 현실에 대해 『국학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했다. 자기같은 「공돌이」는 책임을 지기가 어렵다고 했다. 느닷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국문과 책임론의 되풀이로 느끼면서 의미 깊게 들었다. 나라의 역사와 문화, 예술이 국학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우리민족의 오늘만한 행세나마 국학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민족언어의 유구한 독립계통, 백운 이규보와 다산 정약용의 민족주의와 문학, 다산의 실학정신에 근거한 구한말의 주체적 개화인맥, 일제때 한용운·이육사·윤동주의 시, 얼핏 생각해도 이러한 맥락과 내용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리고 해방후 30여년의 군사독재시절에 우리 문단의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가 감옥으로 갔었다. 이들은 지금도 공치사 한마디 없이 조용히 있다. 실상 정치학교수와 언론인들이 몇단계로 변모하며 이어진 불의의 권력에 이론을 제공하고 하수인으로까지 쓰인 사례가 많은 데에 비하면 문학인들의 수난은 순수한 정신적 저력이었다.

그리고 문민정치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집권층은 개혁과 「역사 바로세우기」를 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군부독재의 인맥이었다는 하나회를 해체시킨 정권의 결단력에 국민은 박수를 보냈었다. 그렇게 하여 권력의 칼자루를 쥐고나서부터 정권은 자만심에 빠졌다. 그리하여 시대마다 색깔을 바꾸며 권력에 영합하는 이들을 다 받아들여 사회의 유지들인양 여겼다. 3선개헌, 유신, 4·13호헌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던 이들까지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형사적 책임을 물어야한다고 말하지 않겠다. 저 유럽에서는 나치시대의 오류들을 사회적으로 청산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적 오류의 잔재가 가장 온건한 방법으로라도 정리되었어야 마땅하다. 양심에 따라 자숙을 시키는 정도로라도 말이다. 이렇게 하지를 못했으니 사회분위기에서부터 개혁과 역사 바로세우기는 실감될 수 없었다. 정의와 가치관이 서지 않는 사회에서는 자연히 이권을 챙기는 일들만 성행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한보사태를 통해 나타난 체제적 타락의 실상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한 윤동주의 「서시」한 줄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소행이다. 지금도 대선을 앞두고 다시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표 계산만하는 이들이 있다. 역사에서 이미 공적으로 단죄된 쿠데타세력의 잔재에 대해 영합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는 언제 정착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의 정통성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나라의 일이 제대로 될 수 없다. 정치적 권위주의와 경륜만을 내세우지 말고 극작가이며 대통령인 체코의 하벨을 보자. 그는 전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했고 정략과 정쟁을 피하며 다만 언어의 존엄성과 가치관을 위해 살겠다고 말한다. 민족과 세계 안의 「진실」을 일깨우는 일, 이것도 국학의 지조와 언어와 문장이 맡아서 할 일이다.<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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