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내 청춘 두번 짓밟았다”/기억하고 싶지않은 ‘3년의 막사생활’ 마지못해 몇마디…/거기서 만난 일본군 핏덩이·한 남긴채 혼자떠나 “호의호식”/“다다쿠마 뺨 후려치고 싶어”일본은 「훈」 할머니(73)의 꽃다운 젊음을 철저히 짓밟았다. 처음에는 「대일본제국」의 이름으로, 그것도 모자라 또다시 「일본군 대좌」라는 개인의 힘으로.
『아가야!』
피맺힌 어머니의 울부짖음을 뒤로한채 공포의 사슬속에 묶여 고향땅을 떠나온지 몇달이나 지났을까. 어디로 가는지,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무덤속의 항해」는 끝없이 이어졌다.
매서운 고함소리에 놀라 배에서 끌려내려온 뭍은 모든 것이 낯선 「이상한 나라」였다. 찌는 듯한 무더위, 이상한 생김새의 사람들. 누군가 여기를 캄보디아 프놈펜이라고 했다. 눈짓으로 서로를 위로하면서 부둥켜안고 두려움을 떨쳐보려했던 친구들과 헤어져 5∼6명씩, 많게는 수십명씩 끌려간 곳은 일본군 부대막사.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지어 길게 늘어선 막사에는 칸칸이 나무벽을 댄 작은 방들이 여럿 있었다.
기자와의 인터뷰 도중 고향땅의 이모저모를 망각속에서 건져올리려 애쓰던 훈 할머니는 이야기가 막사생활에 이르자 입을 닫았다. 그러나 위안소 생활은 할머니의 잃어버린 반세기를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훈 할머니는 거듭되는 기자의 질문에 마지못해 몇마디를 털어놨다.
『그곳서는 1주일 남짓 살았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다다쿠마를 만나 따로 살림을 차렸고 밥짓고 빨래하는 등 그를 위해서만 일했다. 다른 한국인 처녀 2명도 함께 살았는데 후에 죽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이같은 증언과는 달리 그는 적어도 3년정도는 막사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할머니가 끌려간 것이 17∼18세때이고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3∼4년정도 살았다는 증언대로라면 그가 캄보디아 땅에 발을 디딘 것은 1942, 43년께로 짐작된다. 다다쿠마씨가 그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때는 45년 3월이다.
차라리 『아무 일도 없었다』는 할머니의 말을 믿고 싶었지만 다다쿠마씨는 15일 본보 도쿄(동경)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해답을 던져주었다. 그는 할머니가 증언한 위안소에서 일본군당국이 「위안소를 차려놓고 군인들을 놀게 했다」고 고백했다. 할머니를 「친절하고 속깊은 여자」라고 기억하는 다다쿠마와의 만남은 어찌보면 행운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을 더이상 상대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다른 불행의 시작이었다. 다다쿠마가 할머니에게 붙여준 이름은 「하나코(화자)」. 꽃처럼 화사했던 젊디 젊은 그에게 다다쿠마가 남겨준 것은 핏덩어리 어린 딸과 굴욕의 세월뿐이었다.
일본이 패망한 45년. 할머니는 서슬퍼렇던 일본군이 서둘러 떠나고 프랑스 군인들이 밀려들어오는걸 보면서 그저 『세상이 바뀌었구나』라고 생각했을뿐이다. 다다쿠마는 일본군을 따라 철수하지 않고 캄보디아에 남았다. 그리고는 프랑스를 상대로 한 캄보디아인들의 독립투쟁에 관여했다.
프랑스군의 일본인 섬멸작전이 시작되면서 다다쿠마는 절로 몸을 숨겨 승려로 가장했다. 그리고는 남편을 따라 할머니도 산으로 들로 쫓기고 숨어야하는 짐승같은 세월이 닥쳤다. 정글속 진흙탕에서 핏덩이를 세상에 내보내야 했던, 그야말로 짐승같은 세월이었다.
여자는 절에서 살 수 없었기에 근처 마을에서 혼자 어린딸을 키우며 살았던 그에게 다다쿠마는 한번씩 들러 얼마간의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생계를 잇기 위해 그는 밤새워 피륙을 짜 팔아야 했다. 그나마 뜸하던 발길조차 뚝 끊겨버린 뒤 그는 다다쿠마가 다른 여자와 살며 아이까지 낳았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해들었다. 한밤중에 아이를 들쳐업고 찾아 나섰다. 겨우 연락이 닿아 1주일뒤 다다쿠마가 집으로 찾아왔다. 『나를 버리지 말라』고 울며 매달리는 그에게 다다쿠마는 『한국의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약속을 남긴채 훌쩍 떠났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 버린 것이었다.
훈 할머니는 그 뒤 어려웠던 시절에 만났던 캄보디아인과 새살림을 차렸고 두딸과 아들을 얻었지만 고단한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폴포트정권이 들어서면서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학살자 명단」에 올랐던 그는 「하늘의 도움으로」 모진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킬링필드」의 와중에서 아들을 잃었고 이에 상심한 남편은 술주정뱅이가 돼 그의 곁을 떠났다.
인고의 세월과 한동안 씨름하는 동안 할머니는 다다쿠마가 어엿한 사업가가 되어 캄보디아를 드나든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한번도 그와 만날 수 없었다.
『다시는 그(다다쿠마)를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만나게 된다면 뺨을 한대 후려치고 싶다』
자신에게 구비구비 한맺힌 삶을 안겨주고, 고향에 돌아갈 기회마저 빼앗고, 사지에 방치한채 떠난 뒤 이제는 혼자서만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매정한 남자에게 할머니가 내뱉은 원망의 소리는 고작 그것이었다. 이국땅에서 악몽의 세월을 버텨낸 이 늙고 병든 여인에게 「대일본제국」의 후손들은 아직도 「자진해 몸팔러 나선 것」이라며 우기고 있다. 다다쿠마는 할머니와의 인연에 대해서도 『긴 인생의 소중한 추억으로 생각한다』고 주저없이 말했다. 이 기막힌 얘기를 기자는 도저히 할머니에게 전해줄 수 없었다.
◎큰 외손녀 시나양/“할머니 어릴적부터 유교식 교육”/더워도 긴팔·롱스커트 즐겨입는 ‘실질적 가장’
훈 할머니를 그림자처럼 따르면서 보살피고 있는 큰 외손녀 시나(27)양. 그는 할머니의 힘겨운 노년기를 지탱시켜 주는 든든한 기둥이다. 두 동생(19, 17세)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일도 거의 그의 몫이다.
그는 어려운 살림 탓에 어머니를 도와 가족을 보살피느라 초등학교 밖에 다니지 못했다. 온통 여자들뿐인 이 가족의 가장 노릇을 떠맡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가 이름 모를 병으로 몸져 눕게된 10여년전부터. 캄보디아인 아버지는 병든 어머니를 두고 딴 살림을 차려 두 딸과 아들까지 두고 스쿤 인근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는 어머니가 간직하고 있던 보석 등을 처분해 마련한 500달러로 소위 「이자놀이」를 해 생계를 꾸리고 있다.
그는 한국인과 일본인 혼혈인 어머니와 캄보디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25% 한국인이다. 하지만 어릴적부터 할머니에게서 『여자란 이래야 한다』는 유교식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더운 나라에서 살면서도 긴팔에 롱스커트를 즐겨 입는 것도 『옛날의 한국 여자는 몸이 드러나는 옷을 입지 않았다』는 할머니의 가르침 탓이다.
그는 16일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털어 놓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할머니에게 고향을 되찾아 주는 일은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짐을 두어깨에 걸머지고 사는 시나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일이기도 하다.<프놈펜=이희정 기자>프놈펜=이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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