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파악 생존자는 국내외서 160여명 불과일제가 군대를 위해 위안소를 처음 설치한 때는 1932년 상하이(상해)사변이 일어나고부터다. 위안소는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 점령지에 예외없이 존재했으며 위안소의 규모와 지리적 범위는 계속 확대됐다.
한국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서 일본군에 끌려간 열두세살부터 스무살이 채 안된 어린 소녀들은 모두 20만명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중 7만여명이 군대위안부 생활을 했으며 위안부 대부분이 한국여성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국내외 한국인 위안부 생존자는 160여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면서 무참히 살해되거나 일부는 「더럽혀진 몸」으로 조국에 돌아갈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다. 또 일본과 동남아 등에 몸을 숨겨 살고 있기도 하다.
여성들은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미얀마 베트남 파푸아뉴기니 홍콩 마카오와 남태평양의 섬 등으로 끌려가 지옥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한 일본군 의사과장의 증언에 따르면 1943년 1월 현재 중국에 280개소, 동남아시아에 100개소, 사할린에 10개소 등 모두 400개소에 위안소가 있었다. 「훈」할머니가 끌려간 캄보디아 지역은 당시 일본군 제25군이 진주했는데 군대위안부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곳이었다.
일본군은 「좋은데 취직시켜 주겠다」고 유괴하거나, 납치·강제연행을 일삼았다. 또 「정신대」명목으로 위안부를 모집하기도 했고 빚에 팔려 타인에게 넘겨진 소녀들을 넘겨받은 경우도 있다. 일본방위청 문서고의 공문서에 따르면 1938년 육군성 차관 우메즈는 중국주둔 일본군에게 군대위안부 모집은 파견군이 통제하고 현지 헌병 및 경찰당국과 협조하라고 지시, 민간업자 헌병 경찰 영사관 현지 지방관서 등이 총동원돼 군대위안부를 강제 모집한 것으로 밝혀졌다.<권대익 기자>권대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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