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2차통합감독권 설치 논란끝 폐기/97년 3차과거와 흡사 총재입장만 달라1950년 제정이래 한국은행법의 변천사는 「진통과 산고」의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10년간만해도 한은법은 두차례나 개정이 시도됐었지만 재무부(재경원)와 한은간 대립으로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번 중앙은행 및 감독체계 개편논란은 「제3차 한은법」파동이라 할 수 있다.
6·29선언 직후인 87년 7월 민주화 물결속에 한은직원들의 「한은독립선언」으로 시작된 1차 파동은 2년이 넘는 「장기전」이었다. 각 정당은 「한은독립」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고 88년 여소야대의 13대 국회가 개원되면서 야 3당과 여당은 독자적 한은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한은은 그러나 정치권의 법개정안이 독립확보엔 크게 미진하다고 판단, 11월 김건 총재가 독자적 법개정방향을 발표했고 거리에서 100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89년 1월부터 4개월간 재무부와 한은은 실무협의회를 구성, 협상을 벌였으나 ▲은감원 분리 ▲통화신용정책 사전협의 등 핵심쟁점을 놓고 합의도출에 실패했다. 「당사자간 해결」이 무산되자 금융통화위원회는 한은법개정을 「장기과제」로 넘기자고 제의했고 11월 당정과 국회도 2년넘게 끌어온 이 문제를 「없던 일」로 하기로 결정했다.
2차 파동은 95년 2월 재경원이 은감원분리 및 통합감독원 설치를 골자로 한 한은법 개정안을 전격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94년말부터 민주당 경실련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한은독립 움직임에 대한 「맞불작전」이었다. 재경원은 「신속처리」방침하에 대통령 결제후 발표 닷새만에 국무회의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사흘후 국회에 제출하는 등 초고속으로 일을 강행했다.
한은은 재경원안을 공식 거부했고 노조는 물론 총재 임원 부서장들도 반대입장을 밝혔다. 특히 6·27지방자치선거가 임박한 상황에서 한은 및 야당 시민단체의 거센 반대가 계속되자 여권내에서 「유보론」이 강력 대두됐다. 결국 한은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심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채 14대 국회가 막을 내리면서 자동폐기되고 말았다.
지금의 3차 한은법파동도 1, 2차때와 상황은 매우 유사하다. 한은총재가 정부안에 동의했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일 뿐 은감원분리는 여전히 최대쟁점이고 재경원강공 한은저항 시민단체의 한은지지 등 전개구도도 비슷하다. 선거가 임박했다는 정치일정까지 흡사하다. 「소모전」으로 끝난 두 차례의 경험은 3차 한은법파동의 귀착점을 어느정도 가늠케한다.<이성철 기자>이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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