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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50년­훈 할머니 가시밭길 인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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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50년­훈 할머니 가시밭길 인생:1

입력
1997.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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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전에 고향땅 밟아봤으면”/이름도 성도 잘 모르지만 “나는 한국인”/“끌려가는 등뒤로 울부짖던 어머니” 생생/검정고무신에 그네·널뛰기 어렴풋한 기억「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가와리 나미코」 「하나코」 「훈」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한많은 50여년을 지내온 여인. 정작 자신의 부모에게서 받은 진짜 이름은 기억해 내지 못해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 그러나 「훈」(73) 할머니는 『나는 한국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가 기억하는 고향은 「진동」(경남 마산시 진동면)이라는 작은 어촌.

『동남향 집 뒤편으로 큰 산이 있고 산에는 절이 있었습니다. 집옆에는 작은 시내가 있었는데 여름철 비가 많이 내리면 내가 넘쳐 집까지 물에 잠기곤 했지요. 1㎞쯤 떨어진 곳에 바다가 있었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동무들과 어울려 소학교에 다녔습니다』

일본 점령, 일본 패망, 프랑스군 진주, 독립, 악몽같았던 내전 등으로 얼룩진 캄보디아에서 50여년을 보내며 할머니는 한국에 대한 모든 것을 잊었다. 아니 잊기위해 노력해야 했다. 2차대전후엔 프랑스군이 일본인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깡그리 죽이려 했고, 독립후에도 크메르 루즈 집권시절엔 외국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모진 목숨이나마 살아남기 위해 「한국인」이며 「일본인의 아내」였던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춰야 했다. 그렇게 망각의 어둠속으로 밀어넣었던 세월을 이제는 하나하나 끄집어 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죽기전에 「한국인」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할머니에게는 유일한 소망이자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버팀목」인 것이다. 그는 면사무소 직원이었던 아버지(가와리 나이·창씨개명한 이름)와 성이 「남」으로 기억되는 어머니 슬하에 3녀1남중 둘째로 태어났다. 일본으로 시집간 언니의 왼쪽 눈썹위에 날때부터 움푹 파인 자국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형제에 대한 기억은 없다. 할머니는 15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확실치는 않지만 자신의 성이 「장」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어린시절 동무들과 즐기던 놀이들을 기억해 냈다.

『새해가 되면, 기다란 나무판을 버팀목위에 걸치고 양끝에 한사람씩 올라서서 번갈아 뛰는 놀이를 했다』 우리 고유의 설놀이인 「널뛰기」를 기억해 낸 것이다. 또 『얼음판에 나무판을 대고 양손의 꼬챙이로 밀며 미끄러지는 놀이(썰매), 줄을 길게 늘어 뜨리고 하늘로 솟구쳐 날으는 놀이(그네)도 많이 했으며 근처에 있는 바다와 냇가에서 동무들과 헤엄도 치고 물고기도 잡았다』고 회상했다. 소학교를 졸업한뒤 군대위안부로 끌려오기 전까지 그는 집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를 도와 집안살림을 챙겼다. 여자가 17∼18세까지 시집을 가지 않고 댕기머리 늘어뜨린채 사는 것이 당시로서는 흔치않은 일이지만, 넉넉치 않은 살림탓에 가사를 도와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끌고갔다. 그는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는 내 뒤를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쫓아오다 혼절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흐느꼈다. 진동 마을에서 또래 소년 6, 7명과 함께 끌려간 곳은 부산(추정). 그곳에서 수백명의 남녀와 함께 배에 태워졌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공포의 항해」가 이어졌다. 중간에 풍랑을 만나 잠시 대만에 정착한 뒤 싱가포르, 베트남을 거쳐 메콩강을 따라 올라 도착한 곳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캄보디아 프놈펜. 거기서 한 배에 태워졌던 사람들은 수십명씩 뿔뿔이 흩어져 일본군 막사로 보내졌다. 「정신대」라는 이름아래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최근 그에게는 소중한 기억 한가지가 떠올랐다. 캄보디아에 끌려온지 얼마되지 않아 남동생에게 2, 3차례 편지를 받았던 사실이다. 남동생은 어디서 주소를 알았는지 『어머니가 위독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눈물섞인 편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호소에도 일본군은 그의 귀향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만약 고향 「진동」에 나의 가족중 누구라도 살아있다면, 그 편지를 보냈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라며 『이 사실을 한국신문에 크게 내달라』고 호소했다.<프놈펜=이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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