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땅 민들레삶 반세기 한맺힌 절규/18세때 일제에 끌려가,생존위해 현지 결혼/부산→대만→싱가포르→베트남→프놈펜 기구한 인생유전/한때 실어증… 한국말 더듬 아리랑 듣고 눈물「이렇게 기구한 운명도 있을까」
2차대전 당시 일본군 군대위안부로 캄보디아로 끌려간 「훈」 할머니의 인생유전은 한편의 드라마이다. 42년초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이역만리 캄보디아의 일본군 부대까지 끌려갔다.
할머니 등 한국인 남녀 2천여명을 태운 상선은 한달여의 항해 끝에 대만 싱가포르 베트남의 메콩강을 거쳐 캄보디아 프놈펜까지 갔다. 할머니는 이때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본군 막사에서 병사들의 성욕을 채워주는 도구로 전락했다. 44년말까지 이런 생활을 하다가 「하나(화)」라고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준 한 일본군 장교의 눈에 들어 막사 밖에서 살림을 차렸고 딸까지 낳았으나 딸은 이내 죽고 말았다. 패전이 짙어지자 이 장교는 할머니를 버려둔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살아남기 위해 캄보디아인과 결혼, 프놈펜에서 79㎞떨어진 콤폼참의 메콩강 유역 스쿤마을에 정착, 「훈」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들 하나와 딸 둘도 두었다. 그러나 56년께 캄보디아에서 내전이 발발, 몇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서 아들은 학살당했다.
이후 손녀와 살던 할머니는 지난해 7월28일 약재를 구하러 다니던 한국기업인 황기연(43)씨를 손녀가 우연히 만나면서 한맺힌 일생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할머니는 황씨를 처음 만났을 때 부둥켜안고 1시간여동안 울기만 했다. 53년만에 처음 보는 동포였기 때문이다. 황씨가 아리랑을 불러주자 멜로디를 기억하고는 따라 웅얼거리기도 했다. 그네타는 사진을 보여주자 금세 알아보고 그네와 썰매타고 놀던 일, 김치 등을 떠올렸다. 할머니는 또 어머니와 함께 절에 갔던 일, 고향에서 1㎞ 떨어진 곳에 바다가 있었다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일본군 막사 생활이후 충격으로 말까지 잊어버렸던 할머니는 황씨를 만나면서 고향과 가족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고 요즘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등의 말도 더듬거린다. 할머니는 『불심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자살했을 것』이라며 『죽기전에 고향에 가 가족을 만나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사연은 13일 캄보디아 영자신문 프놈펜포스트와 AFP통신을 통해 전세계에 알려졌다.<박진용 기자>박진용>
◎훈 할머니의 현재/킬링필드때 세자녀 잃고 손녀와 외로운 생활
1남3녀중 둘째로 태어난 훈 할머니는 강제연행될 당시 언니는 도쿄(동경) 어디론가 시집간 상태였고 여동생, 막내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43년초부터 프놈펜의 일본군 막사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1년뒤 한 일본군 장교의 눈에 띄어 살림을 차리고 딸 하나를 두었지만 일찍 죽었다. 「다다코마」로 알려진 첫 남편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혼자 일본으로 떠났으며 현재도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훈 할머니는 캄보디아에서 10여년간 천대받으며 고생하던중 56, 57년께 캄보디아인과 재혼,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던 폴 포트 정권에 의해 외아들을 잃었다. 그뒤 두 딸마저 숨져 손녀와 생활하던중 지난해 7월 손녀가 우연히 황기연씨를 만나면서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최서용 기자>최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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