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는 인간의 삶을 탕자의 길에 비유한다. 기독교의 교리에 비추어 본다면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매우 적절한 묘사가 될 것이다. 성서에는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허랑방탕하는 탕자와 대조적인 삶을 사는 큰 아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탕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삽화의 취지를 살핀다면 큰 아들은 유명무실한 존재이며, 무릇 인간이란 모두 탕자인 셈이다.아버지의 가독을 무시한 채 집을 나서는 탕자의 선택에는 대체로 세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당연히 그 중의 하나는 「돌아온 탕자」의 길이다. 부랑과 타락의 삶에 지친 그는 아버지의 관용에 감읍한 나머지 배전의 열정과 성실로 집안의 가훈에 충실하게 될 것이다. 『돌아온 탕자는 쳐죽여야 한다. 왜냐하면 돌아온 탕자는 더 나쁜 것, 즉 보수반동을 가져오니까. 돌아온 탕자만큼 우리를 왜소하게 하는 것은 없다』 장정일의 말이다. 그러나 장정일의 생각은 소수의견으로 머물고, 그는 지금 우리사회의 아버지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탕자」로 낙인찍혀 실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판사의 선고문에는 그가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는다는 구절을 명시하고 있다.
그가 개전의 정을 보일 리 없다. 그는 자신이 이름붙인 「진정한 탕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탕자는 한 방울의 물이나 한 점의 떡도 지니지 않은 채, 약대(낙타)도 없이 사막 끝으로 가서 죽어야 한다. 한 곳이 아니라 점점이 여러 곳에! 그리고 탕자들이 뼈를 묻은 곳에서 또 다른 탕자가 숱하게 다시 출발해야 한다』
장정일의 구속을 보면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돌아온 탕자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씁쓸한 소회를 감출 수 없다. 돌아오지 않는 탕자 장정일은 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나름의 예술적 성취를 이룬 소수 중의 하나이다. 그가 진정한 탕자가 되어 사막의 끝으로 가서 죽는다면, 아마도 그의 말처럼 그의 무덤에서 또 다른 숱한 탕자들이 다시 가출을 시작할 지도 모른다.<김영민 한일신학대 교수·철학>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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