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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영화 로비스트가 없다/김동호(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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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영화 로비스트가 없다/김동호(아침을 열며)

입력
1997.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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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산업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잭 바렌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려 32년동안 미국영화협회장으로 있으면서 세계 각국으로 하여금 영화시장을 개방하도록 함으로써 전세계에 악명(?)을 떨쳐왔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통상산업부 직원은 물론, 국회의원과 대통령까지도 미국 영화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앞장세워 왔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와는 무관하게 하버드대학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획득하고 존슨 대통령의 특별자문관으로 일하던 그를 영화계에서 영입, 명실상부한 미국영화의 대부격인 로비스트를 만들었다는 점이다.베를린영화제가 열리고 있던 지난 2월16일 유니프랑스, 브리티시 스크린, 스위스필름, 오스트리아필름 커미션 등 10개국의 영화진흥기구 대표들이 베를린에 모여 유럽영화진흥기구(European Film Promotion)를 창설하였다. 홀랜드필름(네덜란드)의 클라우디아 랜스버거여사를 대표로 선출한 이 기구는 유럽연합(EU) 미디어 프로그램의 후원을 받고 있다. 그들은 칸영화제에서 판촉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아시아영화계와의 협력을 위해 10월에 열리는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표단을 보내겠다고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또한 90년 뉴델리에서의 준비회의를 거쳐 94년 12월 마닐라에서 창설된 아시아영화진흥을 위한 네트워크(NETPAC)도 금년 부산영화제에서 총회를 열고 새로 탄생한 유럽영화진흥기구와의 제휴를 바라고 있다. 이들 유럽영화진흥기구나 NETPAC 등은 자국 또는 회원국 영화산업을 대변하는 강력한 로비스트들이라고 할 수 있다.

5월18일 폐막된 제50회 칸영화제에서 일본과 이란 영화가 나란히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일본 여자감독의 작품이 황금카메라상을, 홍콩감독이 감독상을 받았듯이 최근 구미 영화계에서 아시아영화에 대한 관심은 매우 증폭되고 있다. 아시아 감독들의 회고전이 여러곳에서 열리고 있고, 중요 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들이 잇달아 수상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영화가 중요 영화제에서 수상할 수 있는 분위기는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에 접근하기 위한 우리들의 자세와 의지라고 하겠다. 국제영화제에 자주 참가하다 보면 세계 영화계를 주도하고 있는 인사들이 불과 100명 내외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칸의 질 자콥, 베를린의 모리츠 하델른, 낭트의 알랭 잘라도, 몬트리올의 세르즈 로직, 로카르노의 마르코 뮐러 등 주요 영화제의 집행위원장들은 장기 집권을 하고있거나 영화제를 전전하던 사람들이다. 영화를 선정하고 경쟁부문에 뽑아 넣는 영화 선정위원들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재임 1년만 넘기면 장수장관으로, 한 임기만 채워도 천행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기대할 수는 없지만, 한두 사람이라도 책임있는 자리를 주고 5년만 최선을 다해 영화외교를 하고 다니게 한다면 훌륭한 로비스트로 키울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우리 영화계에서 칸 베를린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상할 수 있는 작품성있는 영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세계 영화계에서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한두 사람의 전문가나 로비스트를 길러내는 것도 시급한 일이다. 자국영화의 진흥을 위해서 한 해에 5억∼10억 달러의 방대한 자금을 제도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는 프랑스나 독일을 쫓아 가지는 못한다 허더라도,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에 대처하고자 하는 정부나 관계기관의 의지나 노력이 가시화되고 있지 않는 것도 안타깝다.

지난 일요일 경기 벽제에서 열린 임권택 감독의 새 영화 「창」의 크랭크인 현장에 오랫동안 칸영화제의 선정위원 역할을 하고 있는 피에르 리시엥씨를 초청한 것은 비록 작은 일일지는 몰라도, 제작자들의 이런 노력들이 모아져야만 우리 영화의 해외진출도 활발해지리라고 믿는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한창이던 93년 9월 프랑스의 탄광촌인 릴에서는 프랑스와 미테랑 대통령,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 자크 투봉 문화부장관과 각계 인사 1,600명이 모인 가운데 개봉을 앞둔 클로드 베리 감독의 「제르미날」 시사회가 열렸었다. 미국영화 「쥬라기공원」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대해 자존심이 상한 프랑스 지성의 일대 시위였다고 할 수 있지만 자국영화에 대한 지도층의 이런 애정이 마냥 그리워지는 아침이다.<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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