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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5개월 요트세계일주 강동석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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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5개월 요트세계일주 강동석 수기

입력
1997.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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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별 벗삼아 대해 고독 견뎌”/공부벌레 대학생 대신 선택한 요트의 꿈/태평양횡단 성공후 말리던 부모님도 후원/항해중 아버지 죽음 가장 큰 위기/끝없는 외로움 풍랑과 충돌의 공포감/때론 감옥같았던 2평의 선상생활…/이 모두를 극복하자 바다는 ‘나만의 세상’『바다는 투쟁이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존경하고 함께 어우러져야할 거대한 자연이었다. 지금도 바다를 이겨냈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바다의 너그러움에 감사할 따름이다』. 한국인 최초로 요트를 타고 세계를 단독일주한 강동석씨. 항해도중 부친의 사망소식을 듣는 등 숱한 역경과 고난을 극복해야 했던 그의 3년5개월을 돌아본다.<편집자 주>

부산으로 오기전 마지막 기항지인 일본의 오키나와(충승)에 다가갈수록 성취감보다는 까닭모를 아쉬움과 허탈감이 짙어졌다. 세계일주의 종착점을 향해 하루하루 나아가고 있는데 왜 이럴까 싶었다.

곰곰 더듬어보니 그간 수년간 정열을 모두 바치다시피한 바다에서의 생활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스멀스멀 번지고 있었던 탓이라고 결론내렸다. 요트, 바다, 탐험, 도전, 생명, 그리고 인생 등 새삼 온갖 단어들이 머리속에서 명멸했다. 그리고 가장 밝게 「나의 꿈」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에게 흔히 던져지는 타인들의 물음은 주로 「왜」였다.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그 어려운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물론 좋아서 한다고 말했지만 이것만으로 모두를 명쾌하게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이야기를 하자면 과거로 돌아간다. 「공부벌레」라는 별명을 들을만큼 성실하게 보냈던 베버리힐스 고교생 시절을 끝내고 UCLA에 들어가면서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의미, 존재 등은 항상 내가 붙들고 있던 화두였다. 장래 희망을 물으면 으레 답하던 변호사, 공인회계사 아니면 큰 사업가 등이 과연 내가 원하는 것들인지 아니면 단지 부모님의 바램인지 조차 의문이 들때가 많았다.

불현듯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도 하고 모험과 도전에 몸과 마음을 내던지고 싶었다. 새로운 일을 경험하고도 싶었다. 이런 생각이 강해 질수록 대학은 나를 옥죄이는 공간으로 변해갔다. 성적도 떨어졌다.

도서관을 찾았다. 뚜렷한 목표를 세우자는 생각에서였다. 아프리카를 탐험하며 별처럼 인생을 보낸 리차드 버튼, 아라비아사막을 빛처럼 누빈 로렌스 등이 동경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숙명처럼 요트 관련 책자를 접하게 됐다. 윌리엄 버클리가 쓴 3권의 항해이야기를 읽고는 무릎을 쳤다. 마침내 목표를 찾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자연, 바다에 도전하는 모험, 요트 세계일주였다. 더욱이 자료를 찾다보니 요트단독세계일주는 1895년부터 3년간 미국의 조슈아 슬로컴이 처음 이룬 이래 대부분 백인들의 몫이었다. 아시아인으로는 74년 일본의 겐이치 호리에가 첫 테이프를 끊었지만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미미했다. 「하자, 왜 백인들만 할 수 있는가. 한국인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자」는 결심이 섰다.

준비에 나섰다. 항해, 항법관련과목을 수강했다. 아마추어 무선을 배웠고 항해중 크게 필요치는 않았지만 스킨스쿠버 과정도 수료했다. 그리고 요트 구입.

하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태평양횡단에 나서던 때의 항구 분위기는 장례식장 같았다. 모두들 나를 사지로 보내는 듯 했다. 하지만 꿈을 이뤄가는 시작이었다. 요트 인생의 출발이기도 했다.

94년 1월 세계일주를 위해 LA 출항. 태평양 횡단에 그토록 반대하던 아버지까지 에스코트선을 타고 따라나와 격려했다. 당시만 해도 아버지는 언제나 태산처럼 그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산이 아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하와이를 거쳐 도착한 사모아. 뜻밖에 신남철 후원회장과 친구 필립이 LA에서 찾아왔다. 혼자라는 사실에 몸서리치곤 했는데 반갑기만 했다. 그런데 자꾸만 술을 권했다. 반가운 마음에 마다하지 않았다. 주량을 넘었다 싶을 정도로 마셨을때 신회장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LA흑인폭동의 여파로 주유소 문을 닫은뒤 사업이 계속 실패하자 술만 찾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스스로 인생의 패배자로 낙인찍고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같았다. 그 곁에서 나는 자신의 욕심과 꿈에만 집착했을 뿐이었다.

중도포기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이렇게 해서 이루는 세계일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었다. 「왜 참지 못했을까」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생겨났다.

포기할 뜻을 밝히자 어머니부터 말렸다. 『시작한 일은 끝내야 한다』고 했다. 주위분들의 격려도 이어졌다. 『세계일주를 이루는게 아버지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토록 만류하시다가 태평양횡단에 성공하자 뛸듯이 기뻐했고 듣기 싫을 정도로 주변에 내 자랑을 하시던 분이기도 했다.

마음을 다잡았다. 평소 아프리카 여행을 열망하던 아버지가 희망봉에서 보자고 했던 약속은 영원히 이뤄질 수 없게 됐지만 세계일주를 이루고 아버지가 그리던 조국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으로 그 약속을 대신하자고 다짐했다.

사모아-피지를 지나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이제는 투쟁이었다.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바다와의 투쟁. 일부러 이 싸움에 몰입했고 또한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항해 초기 괴로웠던 것은 고독이었다. 망망대해에 나밖에 없다는 느낌은 공포로까지 이어졌다. 아버지 어머니 친구 생각을 하며 달래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외로움을 더욱 크게 키웠다.

하지만 살아가야 했다.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스스로 깨쳐야 했다. 기항지에서 구입한 책과 잡지를 몇번이나 읽었다. 무선교신을 하면서 나뿐만 아니라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의 존재를 느끼려 했다. 10분 또는 길때는 몇시간이나 「선구자 Ⅱ」를 쫓는 돌고래와 벗을 삼았다. 돌고래가 「낑 낑」하며 대화를 청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밤하늘을 보며 별자리를 찾았고 내가 일인다역을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기타를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절규하듯 노래를 부르거나 하모니카도 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와 친해졌다.

바다는 매일매일 다르다. 바람, 파도, 구름, 빛의 반사각도에 따라 얼굴이 바뀐다. 때로는 좌절을, 때로는 희망을 주기도 하고 나의 목숨까지 집어삼키려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편해졌다. 육지에 있는 것 보다는 바다에 있는게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육지에 올라가면 처음 며칠은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걷는다. 흔들리는 배안에서 생활하던 습관 탓이다. 하지만 바다에만 나가면 모든게 자연스러웠다. 나만의 세상이라는 뿌듯함도 있었다.

바다는 투쟁의, 또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존경하고 어우러져야 할 거대한 자연이었다. 지금도 바다를 이겨냈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바다의 너그러움 덕분에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다고 오히려 감사할 뿐이다.

외로움에는 차츰차츰 익숙해졌다. 아니 외로움을 즐길 수도 있게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이 커져갔다. 풍랑, 충돌, 배의 이상유무 등에 대한 걱정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다른 배와의 충돌은 항해의 끝 뿐만 아니라 삶의 마감으로 이어질수도 있다. 낮에는 서로 보고 피해 갈 수 있지만 밤에는 단파라디오로 나의 존재를 알려 피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대답하는 배들은 많지 않았다. 몇만톤, 몇십만톤의 상선과 부딪치면 5톤에 불과한 「선구자 Ⅱ」는 바다 아래로 잠겨야 한다. 이렇게 사라진 요트들이 많다.

그리고 풍랑. LA에서 하와이로 갈때 경험한 태풍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청색, 백색, 녹색으로 색깔을 달리하면서 바다는 변했고 요트는 마치 세탁기에 들어간 것 처럼 흔들리고 회전했다. 기상예보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70노트의 바람이 부는데도 예보는 20노트 정도였다. 예측을 할 수 없다는게 더욱 고통스러웠다.

조용할때의 선상생활은 단조롭다. 2평반 남짓한 선실과 요트위를 오가는게 전부였다. 어떨때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같았다.

식사에 신경을 많이 썼다. 잘 먹어야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한꺼번에 3끼정도의 밥을 한다. 또 감자와 양파 요리를 많이 해 먹었다. 3개월정도는 썩지않아 실은 것들이었다. 감자와 양파를 볶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만드는 비빔밥은 외국인들도 좋아했다. 별미는 참치를 낚아 말린 참치포다. 맛도 있고 비상식량도 될 수 있다.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브리즈번에서 다윈으로 향할때 노을에 반해 양주한병을 다 마셔 버렸다. 비틀거리며 소변을 보러 나갔다가 갑자기 배가 흔들리면서 바다에 빠질뻔했다. 선실에 간이 화장실이 있지만 사용하고 난뒤 처리하는게 귀찮아 생리현상은 대부분 바깥에서 해결하던 습관때문이었다. 다행히 생명줄에 걸려 살았지만 이후로 술은 배에 올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키나와로 갈 때 끝나간다는 생각에 캔맥주를 조금 준비했을 뿐이었다.

먼길을 왔다. 이제 바다인, 요트인으로서의 생활은 잠시 접어둬야 한다. 많은 날을 바쳤지만 후회는 없다. 꿈을 이뤘기때문이다. 꿈을 가지고 이를 실현하기위해 차근 차근 준비한 다음 최선을 다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말을 청소년들에게 언제라도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부터는 바다보다 더 험할지도 모르는 육지 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혼자 거대한 자연, 바다를 헤쳐왔지 않은가. 세계일주를 통해 얻은 경험과 지식, 인내력 등은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말이다.<정리=김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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