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없인 불가능… 모함말라”/중신들 비방불구 7년간 대임맡겨/전염병에 한파·여진침입까지 온갖 난관뚫고 두만강유역 회복김종서 는 삭풍을 동반한 눈보라를 뚫고 두만강가로 말을 몰았다. 다시 한양으로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얼어붙은 말없는 강줄기를 바라보던 종서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은 어느새 물기로 젖어들었다. 지난 7년 세월의 희비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특히 경흥군 개척의 기쁨을 어디에 비할 바 있을까. 경흥군은 조선왕조의 뿌리가 아니던가. 시조 목조 이안사는 한 때 함남 덕원에 자리잡았으나 원의 다루가치(지방관)가 돼 경흥 동쪽 알동에 부임, 민심을 얻어 뒷날 왕조의 기틀을 세웠다.
마흔 셋, 한창 나이에 북방에 부임한 그의 머리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리가 나부꼈다. 온갖 모함과 비난을 잠재우며 북방개척의 대임을 완수하도록 배려한 임금의 은총이 새삼 가슴을 울렸다. 모친상을 당하고도 3년은 커녕 100일 탈상에 만족하고 다시 천리길 변방으로 귀환한 것은 국가백년대계의 초석을 놓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세종의 간곡한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세종 15년 1433년 10월29일 함길도(함경도)관찰사 조말생의 긴급 장계가 날아왔다. 여진족 일파인 우디거(올적합) 추장 양무타우(양목답올)가 아무하(알목하·함북 회령)의 오도리(알도리) 부족추장 퉁몽거티무르(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한 것이다. 퉁몽거티무르는 두만강 유역 여진족 중 세력이 가장 큰 자로 후일 청을 세운 누르하치의 시조였다. 적의 자중지란은 절호의 기회였다.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경원부를 소다로로 옮기고, 영북진을 아무하로 옮겨 백성을 모아 충실하게 만들고자 한다. 조종으로부터 물려받은 천험의 국경을 지키며 변방 백성이 번갈아 수자리 사는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하니 이는 과대함을 좋아하고 공을 즐겨 국경을 개척하는 따위가 아니다』(세종실록 62권 15년 11월21일조).
세종(당시 37세)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 해 12월 좌승지 김종서를 함길도관찰사 겸 도절제사로 발탁, 대임을 맡겼다. 또 경험이 풍부한 하경복을 도체찰사, 거만한 명의 사신과 다투다 가택연금된 이징옥을 영북진절제사로 임명, 김종서를 돕게 했다. 김종서는 성격이 불같은 이징옥을 다독거려 공을 세우게 했다. 이징옥은 그러나 단종 때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파직하자 조선왕조 최초로 반란을 일으킨다.
김종서는 1440년 12월 형조판서로 돌아올 때까지 7년간 최전방에서 6진 개척에 온 몸을 바쳤다. 1434년 봄부터 대역사가 시작됐다. 농민들은 땅을 개간해 씨를 뿌리고 군사들은 석성의 돌을 쌓았다. 그 해가 끝날 무렵 벌써 경원부와 영북진 등 4진을 완성했다. 전염병이 돌아 주민이 떼죽음하기도 하고 소와 말이 수없이 얼어죽고 굶어죽기도 했다.
여진족의 침입도 힘겹게 물리쳐야 했다. 김종서는 그래서 병력 4,200명 정도를 동원, 여진족을 본격 정복할 세밀한 계획까지 세웠다. 그리고 세종에게 건의했다. 『7, 8차례나 침략을 받고도 큰 나라의 의리만을 내세워 토벌하지 않는다면, 저들이 「조선은 큰 나라로서 의리를 지켜 우리 행위를 응징하지 않는구나」라고 존경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를 겁내고 나약해서 보복공격을 하지 못한다」고 비웃겠습니까… 시기가 절박한데 어찌 수년을 기다려 토벌에 착수한단 말입니까』
그 무렵 추운 어느 겨울날, 김종서는 노심초사하는 심정을 시로 떨쳐냈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만리변성에 일장검 잡고 서서/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그러나 한양에서 들려오는 비난은 현지의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중신들은 틈만 있으면 『김종서가 사람의 힘으로 이룩하지 못할 일을 벌이고 있으니 그의 죄는 잡아 처형하여도 남음이 있다』고까지 극언했다.
김종서는 상소를 올렸다. 『…어떤 것이 충이고 어떤 것이 사인지, 어떤 것이 공이고 어떤 것이 사인지 저처럼 어리석고 분수를 모르는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공사의 분간이나 충사의 판가름은 오직 전하께 있을 따름입니다. 예부터 먼 외방에서 일을 보는 신하는 갖은 비난과 모략을 당하여 화를 면하지 못하기 일쑤였습니다. 고려때 윤관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는 명문가 출신에 큰 공이 많았는데도 참소와 비방을 면치 못했는데 신이 조그마한 공로도 없고 능력도 없고 잘못한 것만 많사오니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대왕의 답은 지엄했다. 『어찌 경은 그같이 나약한 말을 하는가? 나의 지극한 마음을 헤아려 오직 소임에만 충실하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1449년 세종 31년에 부령을 끝으로,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의 6진이 모두 설치됐다. 두만강 하류 남안까지 확실한 우리 땅이 되는 순간이었다.
◎돋보기/대호 김종서/문반출신 호랑이 장수/학문 높아 ‘고려사’ 편찬도/단종 보필하다 피살 비운
김종서는 여진족에게는 대호로 통했다. 그만큼 두려운 장수였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눈보라 속에서 망향에 젖는 병사들에게는 어버이같은 존재였다. 그는 무장으로 명성을 드높였지만 15세 때 문과에 급제한 문반이다. 사간원의 요직과 좌·우승지(수석비서관)를 지냈을 만큼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세종은 중신들이 육진개척의 일로 김종서를 비난하자 『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며, 종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없었다면 이 일을 주관하지 못했을 것이다』(연려실기술 권 3, 세종조 고사본말 육진개척조)라고 일갈했을 정도다.
김종서는 나중에 지춘추관사로 「고려사」 편찬을 책임지게 된다. 당시 집필과 교열을 맡은 사람들은 김종서 외에는 모두 집현전출신 일급 학자들이었다. 이들을 지휘하여 역사편찬을 이룩했다는 것은 그의 학문적 역량을 잘 보여준다. 김종서는 나중에 좌의정에 오르고 문종 사후에는 세종의 유언에 따라 단종을 보필한다. 그러나 1453년 64세에 왕위를 노리는 수양대군(후일 세조)에게 살해당한다. 이에 더해 대역모반죄의 누명을 쓰고 전 생애의 업적과 공로를 박탈당했다. 수양의 편에는 육진개척 당시 막하에서 문관으로 한없는 아낌을 받던 신숙주도 포함돼 있었다.
◎세종 어록
『술의 해악은 매우 크다. 술은 안으로 마음과 의지를 손상시키고 밖으로는 위의를 잃게 한다. 혹은 부모를 내버리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어지럽게 하여, 크게는 나라를 잃고 패가망신하며 작게는 성품을 해쳐 제 목숨을 잃게 한다. 윤리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풍속을 퇴폐하게 하는 것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세종실록 62권 15년 10월28일조. 태종은 세종의 대군시절에 『술을 마시되 그칠 줄 안다』고 평한 바 있다).
『무당이나 점쟁이의 일은 매우 해괴하므로 마땅히 엄금해야 한다』(실록 72권 18년 5월11일조. 세종은 현실적 합리주의자였다).<이광일 기자·제자 안상수 홍익대 교수>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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