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력과 무관한 생활을 하고 있다. 문필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게 어느덧 30년 가까워 간다. 40세가 되어갈 무렵 다니던 직장을 스스로 그만 두고 글쓰는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27세 때인 57년 나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수난이대」라는 단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런데 직장에 매인 관계로 원고 청탁서가 와도 작품을 제대로 마감일에 맞춰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시를 쓰는 분은 직장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작품을 생산할 수가 있지만 소설은 일종의 노동이어서 그렇지가 못하다. 특히 술을 좋아하는 나는 1주일에 2∼3일은 퇴근후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러니 더욱 소설쓰기가 힘들었다.
문학도 제대로 안 되고 직장일도 차츰 타성에 빠져드는 지경에 이른 나는 결국 소설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느냐, 아니면 아예 문학을 단념하고 직장생활에 충실하느냐 하는 양 갈래 길에 서게 되었다.
어느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나는 아내에게 그 얘기를 꺼냈다. 문학을 제대로 하려면 아무래도 직장을 그만 두는 수 밖에 없겠는데, 당신 의견은 어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아내는 좀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남자가 하고 싶은대로 하이소. 살아 있는 사람의 입에 거미줄 치는 법은 없으니까예』,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놀랐다. 『그 든든한 직장을 그만 두다니(나는 당시 교육연합회, 즉 지금의 교총 출판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신 정신 나갔소. 글을 써서 먹고 살 자신이 있소?』 하며 반대를 할 줄 알았는데 정말 뜻밖이었다.
그렇게 하여 직장을 그만 두고 전업작가로 들어 앉았는데, 그 무렵은 문단이 좁아서 나의 그런 결단이 화제가 되어 이 잡지 저 잡지에서 장편이나 단편의 청탁이 왔고, 잡문 청탁도 더러 있어서 직장생활을 할 때와 별 차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지방신문에서 연재소설 청탁이 오기도 해 처음으로 신문소설을 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붓 한자루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어서 30년 가까이 지내오는 동안 어렵고 고달픈 고비도 적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요일과 관계없는, 다시 말하면 달력과 무관한 생활을 해오고 있는 셈인데, 며칠 전 5월이 다 가서 달력 한 장을 뜯어냈다. 6월. 이제 싱그러운 초여름이다. 그런데 금요일인 6일이 빨간 숫자로 인쇄되어 있었다. 무슨 공휴일인가 싶어 돋보기를 끼고 무심히 다가가 들여다보니 작은 글씨로 「현충일」이라고 씌어 있었다. 『아하, 현충일이로구나』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조금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차츰 기분이 무거워지며 가슴 깊숙한 곳에서 아련한 슬픔 같은 아픔이 꿈틀거리기까지 하였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흘린 우리 젊은이들의 피를 생각할 때 그런 기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가슴 저편에서 솟아오르는 아픔을 느낀 것은 솔직히 말하면 부친의 죽음 때문이었다. 내가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한 것은 한국전쟁이 터지고 얼마지나지 않은 가을이었다. 전쟁때 부친은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장이었는데 어쩌다가 반동으로 몰려 분주소(지서)에서 조사를 받다가 내무서(경찰서)로 넘어가 나중에는 결국 교화소(교도소)로 압송됐다. 그러다가 9·28수복당시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는 그들에게 집단학살을 당하시고 만 것이었다. 소문을 듣고 어머니와 둘이서 허겁지겁 백리길을 걸어 현장으로 갔다. 거기서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목불인견의 처참하기 그지없는 피살체 하나를 찾아냈다. 어찌할 방도가 없어 근처 언덕배기 같은 야산에 매장을 했다. 우리 주변에는 시신을 찾은 유가족들이 여기저기에 매장을 하느라 하얗게 몰려들고 있었다.
그때가 해질 무렵이었는데 서녘 하늘이 검붉으면서도 칙칙한 보랏빛을 띤 노을로 타고 있었다. 마치 지옥의 하늘빛 같은 느낌이었다.
열아홉살 때의 일로 어느덧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때 그 지옥의 하늘빛 같던 노을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머리 속에 선연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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