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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그날의 비목문화제/한명희 국립국악원장(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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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그날의 비목문화제/한명희 국립국악원장(아침을 열며)

입력
1997.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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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햇살이 밝았던 지난해 이맘때의 일이었다. 태고의 정한이 흐르던 강원도 화천골 두메산중에서는 느닷없이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며 이제껏 없었던 이상한 판굿이 벌어지고 있었다.상큼한 신록의 향훈속에 그윽한 분향내가 뒤섞이며 구성진 주악이 흐르는가하면, 천고의 한을 풀어내듯 애잔한 명창(안숙선)의 성음에는 고향땅 부모님을 그리는 판소리의 한 대목이 절절하게 여울지고 있었다. 새하얀 명주천을 창공에 날리며 한사위 두사위 오열하듯 애틋하게 엮어가는 살풀이의 곡선속엔 주렁주렁 슬픔이 묻어나고 통한이 배어났으며,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라고 절규하는 메조 소프라노의 끈끈한 가창이 산자락을 휘감을 때는 포연에 산화해간 젊은 영령들의 꿈과 사랑, 미련과 추억, 설움과 회한이 끈끈한 진액처럼 우리들 가슴속 심연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었던가. 원로시인(홍윤숙)의 추모시가 낭송될 때는 6월의 신록도 창백해지고 북한강 강줄기도 흐름을 멈춘듯 온통 사위가 숙연한 채 육중한 비감이 파도처럼 엄습해 왔다.

<…그대들 왜 이 땅에 태어나/ 한 핏줄 형제끼리 서로 가슴 겨누며/ 목숨 바쳐 이 강토 지켜야 했는가/ 그 길고 슬픈 이야기를 어찌 다 하랴/ 청솔처럼 푸르디 푸른 꿈, 희망, 사랑이며 청춘을/ 후회없이 포탄에 날려 버리며/ 사라져간 한 시대 이 땅의 별들이여/ 그대들 흘린 피값으로 살아남은/ 숱한 홀어미와 슬픈 아들 딸이/ 지난 세월 섬으로 쏟은 눈물, 가난, 외로움/ 뼈가 녹는 그리움에 눈먼 날들을/ 어찌 또 우리가 잊을 수 있으랴>

이렇게 제1회 비목문화제는 지난해 현충일 화천군 화천읍 풍산리 북한강 상류 「비목의 계곡」에서 이색적으로 치러졌다. 매년 현충일이면 도식적인 묵념하나로 지나쳐 버리던 그간의 우리네 관행에 비춰볼 때 이같은 추모예술제의 의미는 결코 작은 게 아니라고 하겠다.

기실 저만큼 어제를 향한 우리의 조망경에는 무엇보다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이 참담한 형해로 다가서고 있다. 그것은 유혈이 낭자한 전장의 핏빛으로 다가서기도 하고, 천지를 진동하는 포성으로 울려오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아침이슬처럼 산화해간 푸른 젊음들의 못다한 미련으로 다가서기도 하고, 피난대열의 아비규환으로 환청되어 울리기도 한다.

잠시만 고개를 돌려도 우리의 뒤안길에는 이같은 엄청난 역사의 상흔과 아픔이 있고 뜨거운 감동과 눈물이 있으며, 누군가가 대신해야 할 못다 핀 청춘들의 꿈이 있고 밀어가 있으며, 누군가가 풀어줘야 할 천고의 한이 있고 파란 멍울의 그리움이 있다.

누군가가 기어이 무슨 일을 해야할 때다. 결코 먼 과거의 얘기로 묻어둘 수만은 없다. 마땅히 누군가가 이 뼈아픈 미완의 역사를 보완하고 어루만져야 한다. 우리의 생명을 대신하고 민족의 명운을 지켜낸 순국영령들의 숭고한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오늘의 세대가 용렬하고 지지리도 못난 후손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기 위해서도 그러하며, 어제의 불행과 비극을 자랑스런 내일의 민족사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도 그렇다.

또 보훈의 달 6월은 왔고 초하의 신록은 더없이 싱그럽다. 그러나 우리네 삶의 현장은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모두가 본분을 잃고 상궤를 벗어난 것만 같다. 이러고야 어찌 우리가 6월을 보훈의 달이라고 뇌까리며 애국을 들먹이고 역사와 민족을 외쳐댈 수 있는가. 우리를 대신해서 젊음을 불사른 호국영령들께 오직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정말 이래서는 안될 것이다. 산천이 노하고 선열들이 분개하기 전에 우리는 다시 다소곳이 옷깃을 여며야한다.

올해 6일에도 옛 격전지였던 멀리 강원도 산골 지난해의 그 자리에서 비목문화제가 열린다. 다시한번 속죄하고 다시한번 반성하며 다시한번 순수한 눈물속으로 회귀하여 우리 모두의 책무를 다짐하고 우리 모두의 순수한 인성과 정서를 공유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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