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귀국 비행기에 오른 95년 5월17일. 그날은 시라크 대통령 당선자가 엘리제궁에 입성하던 날이었다. 시청(시라크는 당시 파리시장)에서 엘리제궁까지 그는 자신의 낡은 승용차를 타고 갔다. 불과 수㎞의 거리였다. 그러나 대권 도전 3수의 집념 끝에 대망을 이룬 이날의 주인공에게는 14년이라는 긴 세월의 인고가 필요했다.그날 미테랑 사회주의 정권의 막을 내리고 강력한 드골리즘의 재개막을 맞는 프랑스 국민들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시라크는 취임사에서 『나는 희망의 수탁자』라고 화답했다.
샹젤리제의 축포를 뒤로 하고 3년 만에 돌아온 서울.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은 현재진행형이었다. 「5·31교육개혁」이 바로 뒤를 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두 지도자는 바다 건너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축제의 함성은 식었고 개혁의 칼날은 녹이 슬었다. 우연일까?
자크 시라크와 김영삼 대통령. 불사조 같은 정치역정과 집념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의 통치스타일과 정치철학은 참 닮았다. 비전보다는 감, 법치보다는 인치에 기대는 것이 우선 그렇다. 또 순리보다는 정면돌파식 도박과 뒤집기를 좋아한다. 카리스마적 보스기질에 의리와 충성을 중요시하는 점도 비슷하다. 필요할 땐 옷도 갈아 입었다.
이번 시라크의 의회해산과 조기총선 카드는 단일유럽통화의 출범을 앞두고 상황 반전을 노린 「깜짝쇼」였다. 「특단의 조치」이자 「중대 결심」이었다. 그러나 동물적이라는 그의 감은 결국 축구경기에서 주장이 차넣은 자살골이 되고 말았다. 그는 총선전 자신의 분신인 알랭 쥐페 총리가 부정부패 등으로 사임압력을 받았으나 끝까지 감싸고 돌았다. 퐁피두 대통령 사망 이후 정치적 변신(정통 드골파 이탈, 지스카르 데스탱 진영 합류, 탈당, 공화국연합 창당)을 거듭했던 그지만 자신을 따른 가신들은 끝까지 중용했다.
두 정치인의 몰락. 그 이유를 이들의 공통된 통치스타일에서 찾고 싶은 것은 기자만의 짧은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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