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확인되는 비극적 감성정호승 시인의 새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창작과비평사간)를 읽으면 시인 특유의 비극적 감성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그 비극적 정조는 정호승 시인의 시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사랑의 담론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사랑을 좌절하게 하는 가혹한 세계로부터 받은 상처의 노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시가 많은 대중적 독자를 갖고 있다는 것은, 시가 가진 감상성의 혐의를 상기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평이하고도 정직한 언어와 단순한 이미지로 사랑의 좌절과 죽음, 그리고 그 안에서도 남아 있는 역설적인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러하지만 정호승은 시적 묘사보다는 진술이 강한 시인이다. 그의 묘사조차도 묘사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이고 실존적인 관점 위에서 진술되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 그의 비극적 사랑의 전망은 다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불가에서 가져온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는 명제는 이 시집의 진술의 구조를 함축한다. 특히 선시풍의 시들은 사랑의 담론을 지혜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사람들은 사랑할 때/ 사랑을 모른다」,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을 모른다/ 사랑이 다 끝난 뒤에도 끝난 줄을 모른다」. 이런 지혜들은 사랑의 소멸 뒤에나 깨닫는 것이다. 이 시집의 많은 시들은 일종의 사랑의 후일담이다. 그 후일담은 씁쓸하고 슬픈 지혜들을 흔적처럼 남긴다. 열정과 희망은 그 지혜의 가장 먼 자리이며, 더 갈 곳 없는 사랑은 죽음에 가 닿는다.
그래서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 우리는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 수 있다」라는 태도가 가능해진다. 사랑과 희망이 없이도 우리는 「열심히」 살 수 있다. 그러나 희망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설적인 희망이다. 그 깊은 희망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고/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그」를 볼 수 있는 종교적 심성에서 나온 것일까? 하지만 결국 사랑은 지혜가 아니라, 희망이 아니라, 호명할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이다. 가령 이런 표현들은 단순하지만, 아프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문학평론가·서울예전 교수>문학평론가·서울예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