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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금에 허리가 휜다

입력
1997.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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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경조사때마다 ‘청구서’처럼 날아오는 부고·청첩장·안내문…/그 반강제의 ‘미풍양속’을 고칠 방법은 없을까부산 동래구 명륜동에 사는 장모(57)씨는 지난달에만 8번이나 결혼식에 다녀왔다. 수입과 지출을 빼놓지 않고 기록해온 그의 일기장에는 지난달 부조금 지출이 40여만원으로 적혀 있다. 200만원 남짓한 월수입의 20%를 차지했다. 4, 5월에 특히 결혼식이 많아 축의금 지출이 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때도 월평균 25만원 정도는 경조비로 나간다.

「큰집」 장남인 그가 챙겨야 할 대소사는 늘 차고 넘친다. 결혼식과 장례식, 회갑연, 돌·백일 잔치, 집들이…. 이만저만 시간과 돈이 드는 게 아니다. 빠뜨릴 수 없는 8촌 범위의 친인척만 쳐도 무려 100세대가 넘는다. 집안의 대소사는 잠깐 들러 부조금만 전하고 끝낼 수도 없는 것이어서 더욱 많은 품이 든다. 얼마전에는 친척 장례 참례 때문에 이틀간 결근했다.

영업용 택시기사인 그는 경조사 때문에 늘어난 지출과 구멍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종종 밤샘 근무를 해야 한다. 몸에 부담이 가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도 그는 어떻게든 경조사에 꼬박꼬박 참석하려고 애쓴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거나 행사가 겹칠 경우에도 인편으로나 은행 온라인 서비스를 통해 부조금만은 꼭 전한다. 『필요할 때 도움을 받았으면 돌려주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고 그런 일이 언짢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1년 간격으로 잇달아 치른 큰딸과 큰아들 혼례는 부조가 없었다면 엄두도 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두차례의 결혼식에 4,000만원 정도가 들었는데 축의금으로 그럭저럭 충당할 수 있었어요. 막내딸 결혼식도 남았고 그동안 신세진 게 많아 부담이 되더라도 열심히 다닐 생각입니다』

인천에서 중소 제조업체를 경영하는 김모(53)씨에게 「부조」는 품앗이도 미풍양속도 아니다. 은행 구청 세무서 경찰서 세관 원청업체 등에서 날아드는 청첩장, 부고장이 다달이 10여개씩 쌓인다. 하나 하나가 빠듯한 시간에 발품을 팔아야 할 과외일이고 돈이다.

지난달에는 결혼식 9건, 장례식 2건, 회갑연 1건에 100여만원을 지출했다. 도저히 몸이 빠져나갈 수 없을 때는 부하 직원을 보내기도 하지만 대개는 직접 부조봉투를 들고 간다. 『번듯한 인맥도, 따로 쓸만큼 풍부한 비자금도 꿈꿀 수 없는 처지여서 경조사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눈도장을 찍고 「보험금」을 건넵니다』

그러나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청구서」를 받아 드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세관 경비원이 어머니 회갑연 초청장을 보낸 적도 있다. 그러나 김씨는 그런 때에도 되도록 「성의 표시」를 하려고 애쓴다. 『만에 하나 사소한 트집이라도 잡히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게 중소기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줄잡아 1년에 1,000만원 정도 들어가는 경조사비는 당장 운영자금 몇백만원이 없어 주변에 아쉬운 소리를 할 때가 많은 그에게는 큰 돈이다. 『부하직원들과의 회식이라고는 삼겹살과 소주파티가 고작인 판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관공서 직원들 친인척 경조사까지 챙겨가면서 사업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단순한 푸념으로 들리지 않았다. 『주위 동료들 중에는 집에 생활비는 못 갖다줘도 부조는 해야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정부가 국가경쟁력 제고니 어쩌니 하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기 이전에 잘못된 부조 관행이라도 바로잡아 주었으면 좋겠어요』<황동일 기자>

◎통계로 본 부조문화/결혼 축의금 한해 2조원 육박

잘 모르는 사람들의 경조사에 일일이 참석하는 것은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경제적 부담도 만만하지 않다. 경조비가 어느 정도로 부담스러운 것일까.

현대자동차가 최근 직원 270명의 경조비 지출 실태를 조사한 결과 연간 평균 경조비는 용돈의 27%인 89만원에 이르렀다. 나이가 많을수록 경조비 지출액이 늘어 월평균 경조비 지출이 20대는 4만7,500원, 30대는 7만700원, 40대는 8만7,000원, 50대는 14만5,900원이었다. 연간 경조비 지출 횟수는 50대 31회, 40대 17회, 30대 16회였고 1회 평균 경조비는 2만5,000원이었다.

특히 50대 이상의 한달 용돈 가운데 경조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48.6%에 달했고 이들중 80%가 경조비가 상당한 부담이 된다고 응답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더라도 주변에 경조사가 생기면 「빌려서라도 한다」는 응답이 53.3%에 이르러 체면을 우선하는 풍조를 확인시켰다.

서울 동작구청이 6급 이하 일반직원 79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경조비에 부담을 느낀다」는 응답이 69.9%였다. 또 부조해야 할 경조사가 너무 많다는 응답이 46.8%, 액수가 많다는 응답이 45.5%로 나타났다. 아예 주변에 알리지 말아야 할 경조사로는 「형제 자매의 경조사」가 첫번째였고 그 다음이 「자녀돌과 백일」 「시부모 경조사」 「장인장모 경조사」 「조부모 경조사」 순이었다. 응답자의 68.6%는 경조비 상한선을 제정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농촌지역에서도 경조비 부담이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농촌진흥청 농촌영양개선연수원의 94년 조사에 따르면 농촌지역 주민들의 자녀 결혼식에는 평균 190명의 하객이 참석, 375만원의 부조금을 낸 것으로 집계됐다. 또 장례식에는 188명의 조문객이 참석, 466만원의 부조금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부담을 무릅쓰고 경조비를 내는 이유는 다양하다. 한국사회문화연구원이 지난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서울지역 거주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경조비를 내는 이유는 「그동안 도움을 받은 적이 있거나 앞으로 자신의 경조사를 생각해서」가 43%, 「사회관행 때문에」가 28%, 「순수한 인간관계」가 24%, 「사업이나 정치적 이유에서」가 4%인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통계에 의하면 94년 한해 국내 결혼식 하객의 총부담은 2조7,099원이었고 이중 축의금이 1조7,338억원에 달했다. 장례식과 회갑·고희연 등의 경조비를 합치면 실로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조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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