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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 개척(다큐멘터리 세종대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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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 개척(다큐멘터리 세종대왕:4)

입력
1997.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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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군” 건의 물리치고 압록강 영토확장/“조상이 물려준 땅서 함부로 후퇴말라”/요충지에 주민 이주 27년 걸려 4군 완성/화포개량 직접 지휘 평안·함길도에 배치1437년 세종 19년 음력 2월. 믿었던 두 신하로부터 뜻하지 않은 장계가 날아왔다. 하나는 강계에서 여진정벌을 준비 중인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 다른 하나는 평안도 관찰사 박안신이 보낸 것이었다. 표현은 완곡했지만 하나같이 국경 최전초기지인 조명간구자를 남쪽으로 후퇴시키자는 건의였다. 조명간은 지금의 평북 자성군 장토면 장성동 일대. 구자란 농업과 수비를 함께 하는 국경요충지의 전략적 개척촌이다.

『조명간구자는 압록강 중류 만곡부에 동떨어져 들어가 있고 무로, 우예와 거리가 아주 멀어 유사시 서로 구원할 수 없는 불리한 위치이고… 경작지가 얼마 안돼 생산량도 적으니 이를 포기하고 주민을 후방으로 소개시켜야 합니다』(박안신).

그러나, 세종(당시 41세)의 답변은 단호했다. 『조명간은 적이 틈 타 들어오기 쉽다. 따라서 주도면밀하게 대책을 세워 엄중히 지켜야 하는데 변방의 장수가 방어를 철저히 하지 못해 여러번 적의 침입을 받았고 마침내 후방으로 물리자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번번이 침략대상이 된 까닭은, 위치가 적 지역으로 굽어져 외따로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장수가 태만하여 방비를 허술히 했기 때문이다. 오늘 이후로는 척후의 운용을 세밀히 하고 방어태세를 강화하여 적침의 근심이 없게 하라. 조상이 물려준 영토는 마땅히 삼가 지킬 것이지, 함부로 후퇴시켜서는 아니된다. 이제 조명간구자를 뒤로 물린다면, 압록강 연변의 다른 마을들도 이를 전례로 삼아 앞다투어 후퇴시키려 들 것이니 그 폐단은 금하기 어려울 것이다』(세종실록 76권 19년 2월14일조).

일곱달 뒤인 9월 이 천은 군사를 휘동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파저강 일대 여진족을 노도처럼 토벌하고 개선하자마자 조명간의 방어시설을 석보로 개축했다. 장수도 파견했다. 또 군마 150필을 보내는 한편 인근에서 주민을 이주시켜 방비를 튼튼히 했다.

1433년 4월과 1437년 9월 두 차례에 걸친 여진정벌(본보 5월26일자 25면 참조)은 결코 일과성 응징작전이 아니었다. 이를 계기로 세종은 시간을 벌면서 치밀한 계획에 따라 북방영토를 개척해 나갔다. 여진족은 쫓으면 물러갔다가 뒤돌아서면 다시 쳐들어오곤 했다. 그래서 모기떼에 비유할 정도였다. 따라서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중·하류 일대 여진족이 넘나드는 지역은 주민이 정착해 생업을 유지하면서 성이나 보를 쌓고 지켜내지 않는 한 언제 다시 빼앗길 지 알 수 없었다.

이를 위해 세종은 요충지에서 가까운 지역은 물론이고 충청·경상·전라도 주민을 북방으로 이주·정착시켰다. 또 행성과 구자를 설치했다. 세종 22년부터 31년까지 10년간 이 일대에 축조한 행성·구자만 16곳이었다.

세종은 1차 여진정벌을 끝낸 지 2개월만인 1433년 6월 시반강가 자작리에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켜 자성군을 설치하는 것으로 4군 경영을 시작한다. 세종 22년에는 상무로보(지금의 후창군 동신면 일대)에 무창현을 두었다가 2년 뒤 군으로 승격시켰다. 세종 25년 1443년 4월에는 조명간에서 가장 가까운 우예보(장토면 토성동)에 우예군을 설치했다. 이로써 태종 16년 1416년에 여연군(평북 중강진)을 둔 이래 세종 25년까지 27년이나 걸려 여연·자성·무창·우예 4군의 완성을 보게 됐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서북쪽 국경이 완전히 압록강 상류지역까지 미치게 된다.

세종은 특히 여진족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화포의 위력에 주목했다. 화포제작소를 별궁 옆에 짓고 직접 지휘하면서 연구를 거듭해 화포개량에 성공했다. 이렇게 개발된 각종 화기와 포병(화포방사군)은 변방개척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1435년에는 평안도와 함길도 각 관아에 1,950문의 화포를 나눠주고 기술자를 파견해 화기 제작 및 발사법을 가르쳤다. 영명한 임금은 전쟁과 싸움에도 이처럼 빼어났던 것이다.

서북쪽에서 이렇게 4군이 하나하나 설치되는 동안 동북쪽 두만강가에서는 김종서가 6진 개척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돋보기/윤관과 한국영토/고려 예종때 17만 대군 휘몰아 두만강 북쪽 700이밖까지 진출/고토회복 잠시뿐… 원에 빼앗겨

세종은 4군과 6진의 개척으로 삼국통일 이후 쪼그라든 영토를 확장시켜 현재 국토를 사실상 완성했다.

통일신라 이후는 대개 대동강과 원산만을 국경으로 삼았고 고려 태조도 청천강과 영흥을 잇는 선까지 밖에 진출하지 못했다. 물론 한때나마 고구려 고토 회복의 꿈이 실현되는 듯한 순간이 있었다.

1107년 고려 예종때 윤관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두만강 건너 여진족을 들이쳐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어 9성을 쌓아 한 때 두만강 북쪽 700리 밖에 있는 공험진까지 진출했다. 이곳은 지금으로 말하면 중국 지린(길림)성 영고탑 부근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이때의 사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두만강을 넘어 10리쯤 가면 평원지대가 나온다. 여기서 북으로 90리쯤 산 위에 옛 돌성이 있다. 그 북쪽 30리에… 다시 북쪽 60리, 그 동북쪽 70리에 토성터가 있으니 이것을 거양성이라 한다. 이 성이 윤관이 쌓은 것인데 그 서쪽 60리에 선춘현이라는 곳에는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비문은 다 호인(여진족)이 깎아버려서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으나, 그 밑을 파봤더니 고려지경이란 글자가 나왔다』 그러나 원나라가 영흥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면서 우리 국토는 다시 오그라들었다. 정말 통탄할 일이다.

◎세종어록/“탁주마시는 자만 처벌/청주마시는 자는 무사”

『나도 본래부터 탁주를 마시는 자는 붙잡히고 청주를 마시는 자는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세종실록 30권 7년 12월14일조. 작은 잘못을 저지른 일반 백성은 쉽게 수색·체포할 수 있으나, 큰 잘못을 저지른 관리들은 적발해 벌주기 어렵다는 뜻).

『옛적에 오랫동안 정권을 잡으면 안된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내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해가 간다. 오래 정권을 잡으면 아무리 마음을 바르고 곧게 갖는 사람일지라도 남들이 사사로이 정실에 치우친다고 의심할 것은 자연스런 이치다』(실록 31권 8년 3월 7일조).<이광일 기자·제자 안상수 교수·홍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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