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데에 이르러 더는 어찌할 수 없게된 판을 「이판 사판」이라고 한다. 오늘의 김영삼 대통령의 입장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일반 국민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대선자금을 공개하자니 그 뒷수습이 힘에 겹고 공개하지 말자니 국민의 여론이 만만치 않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겠지. 어쨌건 대통령이 궁지에 몰린 것만은 확실해』
어떤 잡지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 83%는 대통령의 대선자금 공개거부는 절대 용납 못하겠다며 매우 자세가 강경하다고 한다. 이것도 우려할 상황인데 왜냐하면 만일 대통령이 몽땅 털어놓는 경우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발표한 담화문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대선자금을 공개하겠다는 것인가,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대통령의 입장은 한마디로 공개와 비공개 사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느 쪽이건 정치개혁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 한다면, 야당이 단순한 집권야욕 때문에 계속 국민을 선동하여 대선자금 공개 등을 부르짖으며 정치를 혼란으로 몰고 갈 경우 자금공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치판의 지뢰를 밟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는 비장한 결심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돈 안드는 선거의 풍토까지는 조성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나 적어도 그 발판만이라도 마련하고 정치판을 떠나겠다는 그의 의지, 따라서 앞으로는 대중집회도 못하고 사조직 운영도 할 수 없도록 법으로 못을 박겠다는 그의 각오, 언론매체를 통해서만 모든 후보자가 유권자를 만날 수 있게 만들겠다는 그의 결심, 모든 선거가 철저하게 공영제로 실시되지 않고는 돈 때문에 맺어진 정치인과 기업인의 고리가 끊길 수 없다는 그의 판단.
과거에는 정치 9단임을 자랑하면서 권모와 술수에 능하던 김영삼대통령은 그 모든 시련 끝에 이제 진정한 의미의 정치인이 되고 정치가가 되기 위해 발돋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만이 어떤 모험이라도 감행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험이 사리와 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 모험이라고 할 때 진정 모두가 사는 길이 열리는 것 아닌가.
김영삼 대통령은 이제 이 이상 잃을 것이 없다. 한때는 상승일로를 달리던 이 나라의 경제가 불행하게도 김대통령 취임후 줄곧 하락에 하락을 거듭하다가 이제는 정말 바닥을 긴다. 앞이 보이지 않기는 정계도 마찬가지다. 정치판은 이제 난장판이 아니라 개판이라는 말도 있다. 대통령이 이끄는 여당도 결코 예외는 아니지 않는가. 서로 물고 뜯는 용들의 꼬리만 보이지 머리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국민은 답답하기만 하다.
개인적으로도 김대통령은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가장 사랑하는 둘째 아드님이 감옥에 갇혀 있다. 신문은 오랏줄에 묶여 여기저기 끌려 다니는 그 아드님의 모습을 1면 톱에 어마어마한 크기로 게재하니 그는 더욱 암담한 정신적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런 역경과 시련 속에서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특이한 지도자일지도 모른다. 대국민담화가 야권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줄을 미리 짐작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상황을 그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더러 진실을 은폐하려 든다고? 그렇다면 나도 목숨걸고 한판 하지. 너도 죽고 나도 죽어도 정치판을 한번 깨끗하게 만들어 국민만 잘살게 하면 되지 않나』 그런 무서운 생각이 그의 가슴속 한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경제발전도 남북통일도 다 뒤로 미루더라도 정치를 돈에서 해방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겠다는 그런 뜻이 아닐까.
「이판 사판」이란 말이 반드시 나쁜 뜻만은 아니다. 수양에 전념하는 이판승도 있어야 하고 절의 잡무를 돌보는 사판승도 필요하다. 그러나 때가 되면 「이판 사판」이 아닌가. 막다른 골목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결단이다.
개혁을 갈망하는 국민의 83%를 위해 김영삼 대통령은 차제에 일대 용단을 내릴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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