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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와 피지배만 있다/손혜경(여자가 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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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와 피지배만 있다/손혜경(여자가 본 남자)

입력
1997.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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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남자들은 지배하거나 지배를 받기만 한다. 여자들하고 관계가 그렇다.우리 어머니 시대만 해도 남자는 여자와 생활권이 아예 분리되어 있었다. 남자는 바깥, 여자는 안살림을 했다. 집안이야 어찌됐건 교제나 한량의 놀이 문화를 즐기는 것이 바깥의 생활이라면 가난속에도 어떻게 해서든 가족을 챙겨야 하는 것이 안살림이었다. 게다가 남편이 첩을 두어도 그만, 매일 남편한테 맞아도 그만, 그렇게 한을 안으로만 삭이고 살아온 것이 우리 어머니 세대이다.

그 다음에 도래한 시대는 영 딴판이다. 요즘 신세대는 어떻게 된 것인지 남자들이 전반적으로 유약하다는 인상을 준다. 『자기야 어떻게 해줘』하면서 마누라 치마폭에 엉기는 형상이다. 월급은 아내한테 송두리째 갖다바치고 용돈 타쓰느라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참 딱할 정도이다.

남자들에게 지배받던 어머니의 한이 딸들을 보이지 않게 의식화시킨 것일까. 요즘 여자들은 교묘하게 남자들을 무기력화시킬 줄 안다. 그리고 남자들은 신기하게도 그런 여자들의 지배 밑에 만족해서 부드러운 남자로 살고 있다. 지배하지 않으면 지배 받기만 하는 남자들. 여자들하고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남자들끼리 관계도 잘 들여다보면 지배하거나 지배 받고 있다. 카스트제도라는 이름만 없을 뿐이지 남자들은 학연 지연을 만들어 저희들끼리 계급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움직이기 좋아한다.

식당에 가서 메뉴를 고르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한 사람이 칼국수하고 다음 사람도 칼국수 하면 그 다음 사람은 다른 것을 먹고 싶어도 칼국수를 고르게 된다. 가끔 반기를 들고 뭔가 다른 것을 시키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느라 시간이 걸리면 『어이, 전부 칼국수로 통일하지』하고 군대급식처럼 통일명령이 내려온다. 처음 메뉴를 정한 사람이 직장 상사이면 나머지는 물을 것도 없이 통일되는 것도 자주 보았다. 좀 다른 것을 주장하면 『괜히 티내네』 『혼자 개성 살리시네』하고 면박을 준다.

이런 버릇때문에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관행도 계속 묵인되고 계승된다. 정치판의 그 이상한 줄서기만 봐도 그렇다. 합리적인 개선을 거부하는 이런 행태-바로 지배하지 않으면 지배 받기만 하는 남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지배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 여성과 남성의 장점이 두루 녹아있는 그냥 사람. 그런 남자와 사람대 사람으로 만나고 싶다.

손혜경씨는 4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고있는 화가이다. 『한국 남편치고는 아내를 존중한다』는 찬사를 외국인 친구에게 듣는 화가 남편과 25년째 살면서 아들 둘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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