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대 후반 나이에 이른 시골 출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린 시절 뼈저린 궁핍을 경험했다. 그 시절, 60여명이나 되었던 한 학급의 아동들 중에서 도시락을 싸들고 등교하는 학생은 10여명에 불과했었다. 목메인 점심을 들 수 밖에 없었던 선생님도 점심시간에 운동장으로 모인 결식아동들과 고누(상대의 말을 따먹음으로써 승부를 다투는 유희의 하나)를 두면서 같이 굶었었다. 축구를 하겠다고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 나가는 아이들이 있으면 선생님은 손짓하여 불러 앉히며 나직하게 말씀하셨다. 뛰지 마라.그러나 수업을 마치고 나면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뜀박질로 집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온 식구가 일을 나가고 없는 텅빈 집에 당도하면 허기진 뱃구레는 더욱 아팠다. 부엌으로 들어가 찬장과 살강 구석구석을 서캐잡듯 샅샅이 뒤져보지만, 알뜰하게 씻어얹은 빈그릇들 뿐, 허기진 배를 채울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햇볕만 쨍하게 내려 쪼이는 마당가 울타리 아래 그 또한 굶주려서 구루병 앓고 있는 늙은 개가 넋이 나간듯 엎드려 있었다. 들판으로 나가 찔레순을 벗겨먹고, 목화밭으로 숨어들어 꽃피기 전의 다래를 따 먹으며 배를 채웠었다. 정거장에 있는 과일가게 주변을 맴돌다가 여행객들이 과일을 깎아 먹으면, 그 과도 끝으로 떨어지는 껍질을 받아 먹었던 기억도 없지 않다. 덜 익은 보리싹을 모닥불에 지져 껍질을 벗기고 배를 채웠던 기억도 있다. 그 궁핍의 시간으로부터 40여년이 흘러간 지금도 어쩌다 한 끼니를 거르게 되면, 이마에서 식은 땀이 난다.
그 가난을 벗어난 지금,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을 박정희 대통령 혼자만의 공적으로 돌리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분위기에 대해 나는 모멸감을 느낀다. 궁핍의 시간에서 탈출하려는 국민적 공감대와 의지가 싹트고 있었을 때 박정희란 사람이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만을 인정하고 싶다. 그가 독재자였기 때문에 경제발전이 가능했었다는 논리는 역설적인 논리가 아니다.
그런데 독재자 중에서도 독재자인 김정일이 있는 북한의 국민들은 왜 굶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국민적 공감대 위에 김정일의 정치적 생명이 존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북한 주민들과 유리되어 있는 어설픈 지도자다. 아니라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북한 주민들이 보여주는 오랜 굶주림의 증거가 그것을 말한다. 우리가 북한 주민들의 살벌한 굶주림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퇴행적 지도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땅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 바로 내 이웃이고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궁핍 이상으로 굶주리고 있는 그들이 바로 우리와 같은 땅에 살고 있다는 정서적 황폐감이 그들을 외면할 수 없는 염치를 만든다.
그러나 식량지원이란 임시봉합에 불과한 것이다. 북한의 식량부족은 두 해에 걸친 수해 때문만이 아니다. 나는 92년이나 93년부터 그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몇번에 걸친 국경지역 답사로 알고 있었다. 그들의 식량부족 현상이 농업생산의 구조적 낙후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의 지원 역시 근본적인 것에부터 접근하기를 바란다. 한두해의 식량지원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란 것은 북한을 다스리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른바 협상을 하고자 한다. 이런 경우 협상이란 말 자체가 성립될성 부르지 않은데 그들은 협상으로써 무엇을 관철하고자 한다. 판문점은 두고 베이징(북경)을 협상장소로 선택한 것이나, 판문점이란 경제적인 수송수단을 두고 우회수송로를 고집하는 것도 참으로 배타적이고 공허한 주장이었다. 무리한 생색을 내려는 것도 아니고 자존심을 망가뜨리려는 속셈도 없는데 그들은 남측의 명분에도 두려움을 가진 듯하다. 그러한 두려움에 연민을 느끼지만 우리는 근본적인 지원 접근이 이루어질 때까지 끈질기고도 인내심있는 설득이 필요할 것 같다. 설득의 길도 멀지만 설득은 언어이고 언어는 통일로 가는 다리가 될 것이 틀림없다. 원수끼리도 언어의 통로가 마련되면 화해의 길도 열린다는 상식의 진리를 되씹어볼 시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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