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실향민 고향지원 길 열려/북 수용태도 유연한 변화 주목남북적십자 대표의 베이징(북경) 접촉 결과는 꽉 막혔던 남북 관계의 진전과 주민 화합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북한이 7월까지 1차 지원분 5만톤을 전달받고 8월부터 추수기에 들어가 한숨을 돌리는 상황을 가정하면 이후의 남북관계까지 쉽게 낙관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번 적십자간 합의서 채택은 지난 85년 고향방문단 교환방문 합의 이후 12년만에 이뤄진 것이다. 그동안 양측이 줄기차게 선전전 차원에서 제안했던 대화·접촉 시도가 실질적으로 결실을 맺었다는 점에서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우선 대한적십자사의 지원식량이 원산지(남한)와 한적, 그리고 기탁자 표시를 한 채 북한에 들어가고 한적 요원이 우리 선박을 타고 인수·인도 지점까지 가기로 결정된 것은 남북한 주민간 화해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북한 주민들이 소문으로만 나돌던 남측의 지원 식량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됐기 때문이다. 즉 식량난의 원인이 남측의 봉쇄정책에 있다는 인식 아래 형성된 주민들의 대남 적개심이 어느 정도는 해소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동안 한적의 지원물품은 국제적십자사연맹 표시만 찍혀 전달됐다.
또 이번 합의에서는 양측이 수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직통전화 이용을 보장했다. 현재 북한은 남북한간 26개 직통전화선 중 판문점 적십자 연락사무소간 2회선만을 살려 놓고 있다. 통신문제와 관련, 합의문은 『…가능한 경우 남북 사이에 이미 가설돼 있는 직통전화를 이용하도록 한다』고 규정했는데, 앞으로 양측 협의에 따라 판문점내 2회선 이외에 추가 회선 사용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정부 당국자의 설명이다. 추가 회선이 이용될 경우 서울과 평양의 사무실에서 실무진들간의 구체적인 의사교환이 가능해진다.
남측 기증자가 지원 지역 및 대상자를 지정해 (지원식량을) 기탁토록 한 부분은 민간단체의 대북지원 운동의 명분을 강화, 모금 활동이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실향민은 1천만명으로 이들은 대부분 더 늦기 전에 북녘 고향에 자신의 이름으로 뭔가 도움을 주려 하고 있다. 한적과 정부도 약속한 5만톤을 확보하는 방안과 실향민을 비롯한 민간 차원의 대북 지원 운동이 「질서」를 벗어나는 정도로 확대될 가능성까지 함께 검토하고 있다. 한적과 정부는 개인 명의의 대북 지원은 소규모로 개별차원에서 전개될 것으로 보고 인도주의 차원에서 별 제한을 두지 않을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동해 수송로 확보는 경제적 측면이 고려된 것이다. 동해 지역에서 구입한 지원 물품을 굳이 기존 수송로인 서해쪽으로 옮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문점을 통한 육로 개방 및 취재 허용이 합의되지 못한 것은 지난 84년 북측의 대남 지원 당시 합의 내용에도 못 미치는 아쉬운 대목이다.
북한은 이번 적십자 접촉에서 식량을 얻는 대신 상당수준에서 우리측 요구를 수용했다.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고 있는 북한이 가장 큰 지원국인 남한에만 유독 배타적 자세를 고수하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합의를 통해 양측은 『한쪽이 어려울 경우 다른 한쪽이 돕는다』는 남북한 기본 합의서의 정신을 오랜만에 실현했다.
물론 남북관계의 취약성을 감안하면 합의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고 합의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도 있지만 합의서도출 그 자체만은 평가해 줘야 할 것 같다.<김병찬 기자>김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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