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은 여야에 관계없이 92년 대선자금문제가 이제 더 이상 감추거나, 덮어 둘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점을 우선 명심해야 할 줄 안다. 「한보」로 시작해서 김현철씨의 구속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가 직면해야 했던 총체적 난국상황은 이제 우리가 바라건, 아니건간에 대선자금문제로 그 대미를 장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여권이 대선자금해명방침을 사실상 철회한 것은 우선 대단히 실망스럽다. 여권의 현실인식이 너무 안이할 뿐 아니라 단견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들끓고 있는 여론을 조금이라도 감안했다면, 여론과는 동떨어진 이같은 성급한 결론이 감히 나올 수 있었겠는가. 이와함께 우리는 현재와 같은 난국을 헤쳐나가는데 있어 여권지도부의 전략부재현상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김영삼 대통령이 말했다는 「속시원하게 밝힐 자료가 없어서…」라는 이유는 오히려 사태해결을 더욱 어렵게 할 소지마저 있다. 무엇보다도 허심탄회한 진실규명을 요구해 왔던 국민여론이 이를 수용하려 하지 않으려 할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굳이 대선자금의 공개를 요구하고, 또 촉구해온 데는 92년도 상황의 실정법적 저촉여부를 따지는 것 이상의 뜻이 담겨 있다. 금년들어 내내 우리 사회를 통째로 마비케 하고 있는 「한보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기가 여기에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당장 오는 12월의 대선을 공정하고 깨끗하게 치르도록 하는데 시금석으로 삼고자 하는데도 큰 기대가 걸려 있었다. 우리 정치의 고질적인 고비용, 저효율구조를 혁파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정경유착을 통해 가능했던 변칙적인 정치자금조달에 대한 누군가의 진솔한 「고해」가 있고서만이 가능하며 그것이 바로 김대통령 자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대선자금문제는 여당만의 문제가 아닌데도 여당만 표적이 되고 있다」는 청와대측의 불만도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닌 줄 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당시 야당도 법정한도액을 어긴 비슷한 형태의 대선자금을 조달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굳이 여당의 공개를 요구하는 것은 국정을 책임진 여당이 먼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새로운 정치 풍토조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일 뿐이다. 따라서 「왜 하필 우리만…」이라고 불평할 필요도, 또 해서도 안될 것이다.
거듭 지적하지만 대선자금문제의 회피는 이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우에 불과할 뿐이다. 사용명세는 그렇더라도 적어도 모금총액은 관여인사의 기억을 더듬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대선자금이 국민의 십시일반이 아니라 대기업의 뭉칫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료가 없어서 못 밝히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시중얘기는 김대통령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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