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신뢰기반’은 무형의 큰 자산/국민에 믿음줄 새 정치문화 가꾸자『한국은 신뢰가 낮은 사회이기 때문에 실리콘밸리에서와 같이 소프트웨어 산업이 일어나는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어렵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지난 5일 한 학술토론회에서 이같은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한국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계약에 의해 지적 재산권을 주고 받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구성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비록 가족 중심의 기업문화를 지적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낮은 신뢰의 사회」라는 이 표현은 하이테크와 정보산업이 한국의 21세기 발전을 가져올 것을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뜻밖의 「기습」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국가발전의 잠재력은 반드시 물질적인 역량만이 아닌, 「사회적 신뢰 기반」과 같은 무형의 자산에 의해서도 좌우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정치의 현실은 한보사태와 대선자금 파문에 휩쓸리는 가운데 사회의 신뢰 기반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신뢰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첫째 요인은 국민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제도와 규범을 위반하며 부정을 저지른 정치인들에게 있다.
그러나 최근 사태를 지켜보면서 낡은 정치를 극복하기 위한 진통과정이 「낡은 것과 낡은 것의 대결」로만 치닫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현재 정치가 겪고 있는 진통은 지역주의와 정경유착, 권력의 집중, 보스 중심의 가신정치와 같은 「낡은 정치」를 극복하기 위한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지난 시기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질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 진통 속에서 새로운 정치문화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파동을 계기로 우리는 돈이 많이 드는 정치구조를 극복하고 국민의 불신과 의혹의 대상이 되지 않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낡은 정치의 틀 속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현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의 모색」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상처 입히기」 「인간의 기본적인 신의를 무시한 폭로와 상호비방」만이 난무하고 있는 모습은 대단히 안타까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여당의 천문학적 규모의 대선자금이 「정국의 최대 현안」으로 등장하면 그 문제의 규명과 대책이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략적인 공세만이 횡행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야당의 대선자금」을 문제 삼아 폭로하는 「물타기」도 등장한다. 특히 나는 「과거에 사이가 좋았을 때 알았던 상대방의 약점이나 비밀을 사이가 나빠졌다고 해서 폭로하거나 악용하는 풍토」의 폐해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 함께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그 당시에는 만류하지 못하고 동조하고 묵인했으면서 이해관계가 달라졌다고 해서 당시의 비밀이나 약점을 폭로하는 것은 정치 이전에 인격자로서 할 일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또 정치인들의 그같은 모습은 사람 사이의 믿음과 신의 따위는 얼마든지 저버릴 수 있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줄 수 있다. 이같은 모습이 「낮은 신뢰의 사회」를 「더욱 낮은 신뢰의 사회」로 만들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전 야당의 대선자금과 관련해서 나도 「그때의 이야기」를 해줄 것을 요구받은 적이 있다. 나는 그같은 요구에 대해 『그 사정을 알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알아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그렇게 답변했던 것은 우선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나 자신의 소신이 그렇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현재 진행중인 정치불신과 정치파괴의 대위기를 넘기고 낡은 정치가 무너진후, 새롭게 만들어질 정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국민의 믿음 위에 세워져야 할 뿐아니라 사회의 신뢰관계를 높이는 이해와 조정, 통합의 역할도 담당해야 한다. 과거의 문제를 파헤쳐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만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문화를 어떻게 세워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 새로운 정치문화가 반드시 정경유착의 극복, 고비용 정치의 지양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대결과 갈등의 사회를 「신뢰와 협력의 사회」, 「높은 신뢰의 사회」로 바꿔 생산적인 정치문화를 만들어내는 것도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국민통합추진회의 상임대표>국민통합추진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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