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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영화가 아름답다

입력
1997.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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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성 젖은 유럽,오락물의 할리우드를 대신해 영화예술의 중심축이 동양으로 이동하고 있다/홍콩의 재미,중국의 깊이,인도의 힘…/아시아영화의 ‘칸’ 석권은 우연이 아니다『아시아의 영화가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아시아의 영화는 세계 영화예술로 하여금 아시아의 철학적 신비와 두텁고 깊은 문화의 전통을 향해 그 중심 자리를 옮기게 하고 있다. 영화에 있어서 세기말의 혼돈과 지향성에 대한 담론은 이제 아시아를 빼놓고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난 18일 폐막된 제50회 칸영화제의 심사 결과를 놓고 서방의 외신들은 너도 나도 「놀랍다」고 표현했다. 일본영화 「우나기(뱀장어)」와 이란영화 「앵두맛」 등 두 영화가 나란히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도 이례적이었지만 두 작품이 모두 아시아권에서 나온데 대한 허탈과 시샘의 표현이었다.

칸영화제 관계자들의 분석은 유럽 영화가 타성에 젖어 보다 차원높은 상상력과 철학을 포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반해, 아시아의 영화는 인간 내면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는 것이었다. 바닥난 창의력을 붙들고 허덕이는 유럽 영화의 현실과 영화라는 예술양식의 틀에 수만년 축적된 문화를 쏟아붓고 있는 아시아 영화의 현재는 영상 경쟁에 있어 미래의 판도를 충분히 예측케한다. 잘 포장된 오락영화를 양산하는 미국의 할리우드가 세계 영화산업의 맹주임을 자부한다면, 아시아는 세계 영화예술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할 듯하다.

아시아 영화의 부흥은 80년대 중반 중국과 홍콩의 패기있는 감독들에 의해 비롯돼 대만 등으로 전이됐다. 그전까지 일본이 가끔 세계 영화계에서 화제를 낳기는 했지만 산발적이었다.

「중국 영화의 5세대」로 불리는 일군의 감독들은 중국영화의 세계화를 단번에 이루어 놓은 주인공들이다. 장이무, 천카이거로 대표되는 5세대 감독들은 문화혁명과 10년여의 영화암흑기를 겪었다. 압박 속에서 영상을 설계해 온 그들은 세계의 유명 영화제를 휩쓸며 분출하는 영화적 상상력을 과시했다.

단아한 동양적 색채감과 대륙인으로서의 웅장한 스케일, 인간 삶과 역사의 이치를 관통하는 주제 등 그들이 내놓은 작품들은 완벽하면서도 신비스런 것이었다. 여배우 궁리는 이번 칸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될 정도로 세계적인 배우가 됐다. 중국 영화의 성공은 좋은 작품이라도 제작비조차 뽑기 어려운 열악한 중국의 유통구조와 영화 만들기에 대한 당국의 각종 규제, 탄압 속에서 이룬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크다.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는 중국의 치부를 드러내고 동성애를 다뤘다는 이유로 정작 중국에서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70년대부터 홍콩느와르라는 독특한 장르로 세계 오락영화시장에 뛰어들었던 홍콩은 그 기획력과 자본을 근거로 아시아 영화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성룡 홍금보에 이은 주윤발 장국영 등의 세계적 스타를 배출했으며, 홍콩느와르의 대부 격인 서극감독은 이제 할리우드에서도 극진하게 대접을 받는다.

최근 홍콩의 영화는 오락물 양산의 틀을 바꿔, 7월이면 중국에 반환되는 홍콩을 무대로 도시인의 고독과 상실감, 덧없는 희망 등을 그리는 영화를 많이 만들고 있다. 그 핵심에 「중경삼림」의 왕자웨이감독이 버티고 있다.

21세기 영화에 있어 가장 큰 가능성과 축적된 힘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인도이다. 인도는 1971년 이후 제작 편수에 있어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60여곳의 촬영 스튜디오와 1,000명에 이르는 독립영화제작자들은 1년에 300여편의 극영화와 500여편의 기록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800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있고, 공식어만 16개인 이곳에서는 3종류 이상의 자막을 넣어야 상영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이 식지 않는다. 종교적 신화와 일반적인 사랑 이야기가 영화 내용의 주조를 이루지만 최근에는 성격을 다양화하고 있다. 95년 한국에도 소개된 「밴디드퀸」은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사회적 제도에 대항하는 여자 반군 두목의 이야기로 충격을 주었다. 비록 프랑스에 거주하지만 베트남 출신의 젊은 감독 트란 안 훙의 출현은 아시아 영화에 있어 고무적이다. 「그린 파파야의 향기」 「씨클로」 등 지금까지 단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국제적인 명성의 영화제에서 모두 큰 상을 받았다. 게다가 영화의 불모지로 알려졌던 이란의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칸영화제 수상은 작은 흥분마저 일게 한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수상은 좋은 영화는 좋은 제작여건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때이다. 대형 국제영화제에서 우리는 작품성을 평가받은 적이 아직 한번도 없다.

◎이 감독들을 주목하라/트란안훙·왕자웨이·키아로스타미…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감독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아시아 영화의 부흥을 이끌며 세계 영화계에서 영상의 미학을 과시한 명감독들은 아시아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규정한다. 그들 중 최근 들어 새롭게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감독들에게 거는 기대는 더욱 크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베트남 감독 트란 안 훙(34)은 마스크 만큼이나 매력적인 이력의 소유자이다. 베트남에서 태어난 그는 4세에 라오스로 이주했다가 14세에 프랑스로 이민갔다. 본래 철학도로 지금까지 단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94년 제작한 깜찍한 멜로드라마 「그린 파파야의 향기」로 칸영화제 신인감독상 격인 황금카메라상을 받은데 이어 베트남 인민들의 삶을 그린 두번째 영화 「씨클로」로 95년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트란 안 훙은 색채미학에 있어 가장 앞서가는 감독이다. 강렬한 열대의 원색에서부터 음울한 도시의 무채색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상에 그려지는 색깔은 황홀함이다. 인간 삶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 홍콩영화의 분위기를 바꾸고 있는 왕자웨이(39) 감독은 특히 젊은 층으로부터의 호응이 열광적이다. 「왕자웨이 신드롬」이 생길 정도이다. 젊은이들의 도시적 감성에 맞는 소재와 영상이면서 삶의 보편적이고 미세한 부분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88년 「열혈남아」로 데뷔한 이후 「타락천사」 「중경삼림」 등 일련의 히트작은 영화팬을 매료시켰다. 고전적인 리얼리즘 예술영화에 홍콩오락영화의 맛을 조금 섞어놓은 그의 작품세계는 「도시 리얼리즘」이라 할만하다. 다소 자유분방한 자신의 영화에 대해 그는 『내겐 상업화, 비상업화라는 개념이 없다. 찍고 싶은대로 찍을 뿐이다. 영화는 요리와 같다. 만드는 사람은 구미에 맞게 요리하고 먹는 사람은 그것이 좋으면 먹는 것이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번 칸영화제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57)는 중동지역에서 뒤늦게 발견된 「영화계의 진주」로 평가되고 있다. 테헤란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28세에 청소년지능개발연구소라는 기관의 제의로 영화에 입문했다. 그의 첫 화제작은 지난해 한국에도 소개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89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그해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청동표범상을 받았고 전세계로 배급됐다. 92년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로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상을 수상했다.

그의 영화는 관조적이다. 카메라를 한참동안 고정시켜놓고 렌즈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인내심있게 지켜본다. 그래서 화면속에는 인간의 삶이 포장되지 않은 채 거짓없이 펼쳐진다. 무명의 일반인들을 끌어모아 영화에 출연시키면서도 허점을 찾아볼 수 없는 연출의 귀재이기도 하다.<권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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