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어연구원(원장 이익섭)이 내놓은 로마자표기법 개정시안을 놓고 국어학계는 물론 국민사이에 찬반 양론이 비등하다. 한편에서는 우리국민이 쉽게 배울 수 있고 한글어법에 맞는 로마자표기를 위해 현재와 같은 개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편에서는 외국인들이 제대로 읽기어려울 정도로 발음을 무시한 개정시안은 수용하기 힘들다고 맞서고 있다. 양쪽 의견을 정리해본다.<편집자 주> ◎찬성의견/김세중 국립국어연구원 학예연구관/외국인 위주 현 표기 한글뜻 혼란/반달표·어깻점 실생활 사용안해 편집자>
현행 로마자표기법은 84년에 고시되어 13년이 지났다. 이에 따르면 모음 「ㅓ」, 「ㅡ」를 o, u로 적고 반달표(˘)를 찍도록했다. 또 자음 ㄱㅌㅍㅊ은 k’ t’ p’ ch’로 적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반달표와 어깻점(’)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특히 반달표는 사용하고 싶어도 자판에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도로표지판이나 지하철 등에서는 표기법대로 되어 있지만 여권이나 신용카드에서 이름을 적을 때나 회사 이름을 표기할 때, 혹은 인터넷에서 주소를 적을 때에 현행 표기법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현행 표기법의 문제점은 반달표와 어깻점에 그치지 않는다. 같은 「ㄱ」인데도 「먹다」의 「ㄱ」은 k, 「먹으니」의 「ㄱ」은 g, 「먹는다」의 「ㄱ」은 ng로 달리 표기하게 되어 있어 우리들에게는 여간 어렵지 않다. 로마자표기는 일부 전문가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모든 국민이 자기 이름과 주소 따위를 손쉽게 로마자로 적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로마자표기법은 배우기 쉬워야 하는데 현행표기법은 외국 사람 위주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대단히 거북하다.
현행 표기법은 외국인이 사전 지식이 없어도 국어 발음과 비교적 가깝게 발음한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반면에 무엇을 표기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생기는 단점이 있다. 예컨대 「독문」과 「동문」은 모두 Tongmun으로 표기되므로 그것이 「독문」의 표기인지「동문」의 표기인지 알 도리가 없다. 외국관광객이 와서 간판에 적힌 표기를 보고 소리를 낸 것을 우리가 알아 들어야 할 때에는 소리가 중요하겠지만 인터넷에서처럼 문자를 통한 소통이 중시되는 오늘날에는 로마자로 적어 놓은 것이 한글로 무엇인지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개정시안은 반달표와 어깻점을 없앴을 뿐 아니라 표기의 원칙을 국어 발음 중심에서 국어표기 중심으로 바꾸었다. 그러므로 때로는 외국인이 읽었을 때 국어발음과 꽤 동떨어지게 되는 경우가 생겨나는데 그것은 감수할 수 밖에 없다. 개정안이 발음하기 어렵다고는 하나 church, Christmas, Chicago의 ch를 다 달리 읽는 영어에 비하면 너무 쉬워서 싱거울 정도라 할 것이다.
현행 로마자표기법은 1930년대에 우리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에 머큔과 라이샤워라는 미국의 두 젊은이가 만든 것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데 영어권을 중심으로 외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표기법은 반달표와 어깻점 때문에 영어 사용자들 조차도 불편을 느끼고 있으며 결국 반달표와 어깻점을 생략해 버리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반달표를 생략함으로써 「거창」과 「고창」, 「신천」과 「신촌」, 「성씨」와 「송씨」가 구별 안되는 것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 물론 자주 고치는 일은 좋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외국인들이 자기들 위주로 국어의 체계와 어긋나게 만든 표기법에 더 이상 끌려 다녀서는 안될 것이다.
◎반대의견/이상억 서울대 국문과 교수/개정안표기론 외국인 발음 어색/‘밀어붙이기’보다 사용자위주로
정보화시대에는 사용자위주(user―friendly)의 배려가 최우선이다. 최근 인터넷의 「한국학」이란 전자우편함에는 뉴욕 컬럼비아대, 함부르크대 교수 등 수십명의 외국인들이 현행 로마자 표기법을 개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앞으로 설사 개정되어도 현행안대로 쓰겠다는 뜻을 밝힌 글이 떴다.
외국학자들이나 국내거주 외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철자된 표기결과가 어색하지 않고 발음을 위한 정보가 많이 들어있는 방안이다. 개갈비(dogrib)나 개해방(doglib)을 연상시키는 「독립」보다는 「동닙」이란 발음을 자신들이 낼 수 있는 장치를 원하는 것이다. 개정안은 이런 동화·중화작용 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로마자로 표기해야 하는 용도에는 크게 2가지 부류가 있다. 첫째로 외국인들에게 읽히기 위한 도로표지판, 도서관목록, 여권, 영어논문 등인데 항용 한글을 옆에 쓰므로 이 경우 로마자는 한글을 1대 1로 전자하는 개정안보다는 발음을 도와주는 현행안이어야 제구실을 한다. 둘째는 한국인들이 대형 언어자료를 전산처리할 경우나 언어학적 연구에 필요한 전자법인데 이를 위해서 개정안을 추가로 설정하는 해결책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즉 용도에 따라 사용자 위주로 복수의 로마자표기법을 인정하면 안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개정안은 일부 자체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즉 그 제2안에서 「ㅔ」를 e자로 제안한 의도가 표음적 배려인데 「ㄹ」은 l자만 택해, 제1안에서 「ㄹ」을 r과 l자의 표음위주로 구별하겠다는 의도와 짝이 맞지 않는다. 뒤바꿔서 다시 제안해야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음절경계표지(―)를 덜 쓰게 하기 위해서는 「ㄲ」을 kk로 해야 「ㄱㄱㄱ」이 gkk나 kkg가 되며, 개정안 대로 두면 g―gg 또는 gg―g라는 번거로움이 남고, 「ㅐ」도 「ae」로 해야 ai와 a―i를 구별해야하는 경우까지 쉽게 피할 수 있다.
84년 현행안이 제정될 때 자문을 요청받은 필자는 미래의 전산화시대에 편리하도록 기호를 없애야 한다고 이미 주장했었다. 당시 대안도 졸저 「국어표기 4법연구」에 수록되어 있듯이 나름대로 제시했었다. 그러나 PC가 국내에 보편화하기 전이었기에 미국에서 학위논문을 컴퓨터로 쳐본 나의 체험은 전달될 수가 없었다. 컴퓨터는 그 뒤 많이 발전하여 이제 기호가 큰 장애는 아니지만 특히 모음위 기호는 아직 번거로우니 2개의 모음으로 써보는 방안이 병용되어도 좋겠다.
로마자표기개정으로 도로표지판을 바꾸는데 290억원의 공연한 세금이 쓰이고 외국에서 고군분투하는 도서관 한국사서들을 허탈하게 하는 「밀어붙이기」식 개정은 곤란하다. 사용자위주의 합리적 해법을 취하자. 그리고도 남는 문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상호나 개인성명표기다. 그들을 위의 2개안 중에 어느쪽으로든 따르도록 하는 일도 강제로 될 일은 아니니 상당기간 조정이 필요한 현실이다.
◎국어심의회 거쳐 연내 새 표기법 시행
개정 로마자 영어소문자 표기법은 지금까지 k·g 로 써온 ㄱ을 g로, t·d로 써온 ㄷ을 d로, p·b로 쓰던 ㅂ을 b로, ch·j로 쓰던 ㅈ을 j로 통일하는 한편 「어·으」발음 표기를 위해 사용하던 반달점과 ㅋㅌㅍㅊ을 표기하기 위해 쓰던 어깻점을 폐기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특히 소리나는 대로 적는 현행 전사법을 버리고 한글맞춤법에 따라 표기하는 전자법을 채택했다. 예를 들어 현행 표기법에 따르면 「Songnisan」인 속리산을 「Soglisan」으로 적게 한 것이다.
국립국어연구원과 개정시안에 찬성하는 학자들은 전자법 채택이유에 대해 로마자 표기에서 한글철자법을 회복하기 위해, 곧 소리는 같지만 철자가 다른 상당수 국어단어를 차별해 표기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개정시안에 따르면 지금까지 「Opta」로만 표기하던 「없다」 「업다」 「엎다」를 각각 「Ebsda」 「Ebda」 「Epda」로 구별해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컴퓨터시대에 자판에 없는 어깻점과 반달점을 사용하는 것이 불편한데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무시하고 있어 무원칙한 표기가 남발하므로 반달점과 어깻점을 없애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이다.
우선 반달표를 없애고 「어」를 「E」, 「으」를 「U」로 표기하도록 한 개정시안은 표기와 발음에 상당한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어느 외국인이 E를 「어」로 읽고, U를 「으」로 읽겠냐는 지적이다.
전자법 채택에 대한 비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비판론자들은 도대체 로마자 표기법 제정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외국인에게 우리말과 가장 가깝게 발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로마자 표기의 주요한 목적이고 이런 면에서 볼 때 한글맞춤법을 따르도록 한 개정시안은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이같은 의견차는 어찌보면 「로마자표기의 존재이유가 무엇이냐」는 명제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48년 제정된 로마자표기법은 59년 전자법을, 84년 전사법을 적용해 개정됐으며 개정시안은 국어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개정안으로 확정돼 올해 중 새 표기법으로 쓰이게 된다.<서사봉 기자>서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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