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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인이면 된다/박찬식 논설위원(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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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인이면 된다/박찬식 논설위원(메아리)

입력
1997.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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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미국처럼 총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게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출퇴근 길 붐비는 차도에서 끼여들기를 일삼는 난폭운전자, 길거리나 지하철 안에서 남의 몸을 함부로 건드리고도 시치미를 떼는 얌체들을 혼내 주자면 이제는 총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부녀자나 노약자는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제대로 몸을 가누고 살기 힘들게 된 것이 사실이다.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섣불리 항의하다가는 되레 봉변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웬만하면 눈 감고 참아내야 무사히 하루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면 낮에 있었던 일이 억울해서 밤을 꼬박 새게 되고 만다. 「그때 총이라도 있었더라면 혼구멍을 내 주는 건데」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총을 쐈다가는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야 하게 될지 모른다. 약을 올린다고 주먹을 휘둘러 상대방의 코피를 터뜨리면 폭행죄로 벌을 받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치다. 응징행위가 상식을 지나쳤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아직은 우리사회의 규범이다. 총기소지 자유화 주장은 그래서 몰상식이다.

페루 일본대사관 인질사건은 대통령 후지모리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테러행위가 불특정의 무고한 시민을 희생물로 삼는 극악범죄라는 점에서 그의 승리는 박수를 받을 만 하다.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MRTA) 같은 무모한 무장 게릴라 조직은 마땅히 소탕돼야 한다.

그러나 사건이 종결되고 난 다음의 세계 여론은 그의 편 만이 아닌 것 같다. 방탄조끼 차림으로 한 손에 지휘봉, 다른 한 손에 워키토키를 들고 개선장군처럼 현장에 나타난 후지모리는 너무도 의기양양했다. 머리나 팔다리가 잘려 나간채 몸통만 뒹구는 게릴라 시체의 참혹함은 안중에도 없는 듯 사체를 겅중겅중 넘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상식 밖이었다.

그것은 학살이었다. 테러범도 페루국민의 일부라는 인식이 조금이라도 대통령의 머리에 들어 있었다면 그럴 수는 없다. 궁지에 몰린 빈민이 반란세력으로 조직돼 정부에 무력으로 대항하기까지 사태가 악화된 것도 결국 약자를 보살피지 못한 대통령의 부끄러움 아닌가.

후지모리의 강권통치가 상식을 지나쳤다는 것이 국제여론이라면, 그는 대통령을 그만두고서도 방탄조끼 없이 잠들기 어려울 것이다. 더 강력한 테러집단 센데로 루미노소(빛나는 길)가 보복을 맹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당의 대승으로 마감된 영국총선에서도 상식을 지나친 기만적 정치행위가 보인다. 블레어는 다만 정권탈취를 위해 개혁의 이름으로, 새시대의 명분으로 노동당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보수당의 좋은 정책은 모두 「새 노동당」의 정책이었다. 노동당에 기대고 있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신이 아닐 수 없다.

선거후의 영국 여론은 블레어에게 너무 많은 표를 몰아 줬음을 후회하고 있다. 선거결과에는 영국인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그들은 활기에 넘친 젊음과 멋진 몸짓에 매혹돼 그의 화려한 수사가 상식을 지나치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영국경제가 튼튼하다고 하지만 빈부격차는 미국과 함께 서구에서 첫째 둘째라는 사실이 블레어의 배신을 부각시킨다.

우리 정치는 어떤가. 「따뜻한 법치」를 호소하는 「용」이 있는가 하면 「법대로라 해도 마음은 부드럽다」며 아양떠는 「용」도 있다. 느닷없이 광개토대왕을 들먹이는 대통령후보도 나왔다.

수사의 지나침이요 논리의 모순이다. 법은 추상같이 집행돼야 한다. 그것을 어물어물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사회가 이꼴인 것이다. 좋은 것은 죄다 내것으로 하겠다고 억지를 쓰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지금 이 시대는 신화 속의 영웅이나 영명한 군주의 출현을 요구하지 않는다. 과유불급(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음―논어)의 절도를 아는, 정직한 상식인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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