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례행사된 드라마 비판 하나마나/시청률 굴레 탈피 PD에게 자율성을TV드라마에 대한 비판이 뜨겁다. TV드라마는 폭력 불륜 선정 사치 퇴폐로 욕을 먹고 있으며, 무언가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TV드라마에 대한 비판에 동의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게 있다. 그 비판은 작년에도 듣던 소리고 재작년에도 듣던 소리다.
좀 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유신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살벌했던 시절에도 TV드라마에 대한 비판은 지금과 비슷했다. 우리는 20년 넘게 「TV드라마 비판」이라는 연례행사를 1년에도 몇번씩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왜 그럴까.
우리는 일종의 「바보 게임」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TV를 끊임없이 감시해야 할 죄수로 간주한다. TV에겐 자율성을 주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TV드라마를 만드는 PD들에게 자율성을 주지 않는 것이다. PD가 행여 사회성 있는 주제로 진지한 드라마를 만들려고 하면 권력 또는 방송사 경영진이 제동을 건다. 때론 각종 이해집단이 결사 항전을 선언하며 훼방을 놓는다.
그런데 그럴 경우 TV드라마가 저질이라고 비판하던 사람들은 굳게 침묵한다. 드라마 PD들을 도와줄 뜻이 전혀 없는 것이다. 아니 도와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PD들을 포함한 방송인들이 자율성을 찾겠다고 집단행동을 하면 그들은 방송인들을 거세게 비판한다. 그 집단 행동으로 인해 방송에 차질이 생기면 시청자의 「알 권리」를 빙자하여 방송인들을 난타한다.
이건 적어도 80년대 후반 이래로 여러 번에 걸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방송인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세술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했다.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은 시청률 경쟁에서 승리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그 요구에 따른다. 물론 비판이 뒤따른다. 그러나 비판은 순간이요, 승리는 영원하다. 그래서 그들은 비판에 대해 대단히 냉소적이다.
방송사 경영진도 그런 이치를 잘 알고 있다. 시청률 경쟁에서 승리하고 경영을 잘하면 유능한 경영자로 대접받는다. 신문들도 개별 프로그램을 비판하던 때와는 달리 그 유능한 경영자를 추켜 세운다. 대학에선 명예박사 학위를 주기도 한다. 시청자들도 겉다르고 속다르다. 문제가 많다고 욕먹는 프로그램일수록 시청률은 높다.
TV를 감시해야 할 죄수로 간주하는 기존의 패러다임에서는 TV드라마의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단지 감시와 처벌을 잘 한다고 해서 문제아가 모범생으로 바뀔 수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 문제아가 갖고 있는 잠재적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끔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 그 문제아가 자존심을 갖고 그에 따른 사명감을 느낄 수 있게끔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지금 우리 TV는 관료제 조직의 질곡에서 신음하고 있다. 어떤 조직의 경우 관료제는 필요악이기도 하다. 그러나 TV처럼 창의성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분야에서 관료제는 무사 안일주의와 줄세 제일주의를 낳게 할 뿐이다.
영화감독은 영화 한 편으로 스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드라마 PD는 조직의 「톱니바퀴」로 음지에 갇혀 있다. 그들을 양지로 끌어내 스타로 만들고 스타라는 지위에 합당한 자율성을 부여해 준다면 그들이 발휘하는 리더십이 우리의 TV드라마 문화를 크게 바꿀 수 있다. 감시와 처벌로 TV드라마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문화에 대한 무지요 폭압이다.
TV는 사회의 「피뢰침」이 아니다. TV의 영향력이 아무리 막강할 망정 TV가 모든 사회악의 「희생양」으로 매도되는 것은 그 사회악을 정치경제적인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바로 잡을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세계화를 향해 질주하는 우리 나라가 문화만큼은 우리의 미풍양속을 지켜야 겠다는 건 터무니없는 과욕이다. 매사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문화적 관용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말썽 많은 TV드라마를 좀 더 넓은 맥락에서 고찰하고 보다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할 것을 제안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