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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의 전당대회­후보선출 김대중 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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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의 전당대회­후보선출 김대중 역정

입력
1997.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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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42년 이번엔 ‘인동초’ 필까/박정희 대통령에 근소차 패배­71년/평민당 창당후 출마 3위 그쳐­87년/맞수 YS에 져 정계 은퇴까지­92년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정치역정은 고난과 끝없는 도전이라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김총재는 42년의 정치생활에서 10개의 정당을 거치면서 국회의원에 6번 당선되고 3회 낙선했다. 김총재는 71년 7대, 87년 13대, 92년 14대 등 3차례의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데 이어 네번째 대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김총재는 도전을 거듭하며 40대의 세대교체 기수에서, 반독재 투쟁의 상징, 부패 무능 정권의 대안으로 스스로의 이미지를 개척해 왔다. 이 과정에서 김총재는 때로는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에, 때로는 지역주의에 맞서왔고, 이제는 세대교체와 3김청산의 바람을 경륜과 위기관리 능력을 무기로 뚫으려 하고 있다.

1925년생인 그는 29세 때인 54년 3대총선에서 전남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낙선하는 것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이어 민주당 후보로 59년 4대 재선거와 60년 5대총선에 도전했으나 잇따라 낙선했다. 61년 강원 인제 보선에 처음 당선했으나 사흘만에 5·16쿠데타가 발생, 의원직을 상실했다.

김총재는 70년 예상을 뒤엎고 영원한 맞수 김영삼 당시 신민당의원을 누르고 대통령후보 지명을 획득했다. 71년 4월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 맞서 46%의 득표를 얻으며 신화를 창조한다. 이후 80년 서울의 봄에 사면복권될 때까지 73년 일본으로부터의 납치사건, 자택연금, 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인한 투옥 등 반독재 저항의 구심점으로 탄압을 받았다. 신군부에 의해 80년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뒤 82년 형집행정지결정을 받아 미국에 망명했고, 85년에 귀국해 2·12총선에서 신당돌풍을 일으켰다.

전두환 정권아래서 줄기찬 개헌투쟁을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관철시켰으나 6·29선언뒤 사면복권이 되자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또다시 시련에 봉착한다. 김총재는 후보단일화에 실패,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에 출마했으나 노태우 후보,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를 한다. 야권의 대선패배는 책임론을 불러 일으켰고 김총재에게는 분당에 따른 책임론이 멍에처럼 따라 다니게 됐다. 김총재는 대선패배를 88년의 4·26총선에서 어느정도 만회한다. 제1야당이 된 평민당은 여소야대정국을 주도했지만 2년이 채 못돼 90년에 3당합당의 비운을 맞는다.

3당합당으로 사실상 외톨이가 된 김총재는 와신상담끝에 91년 이기택 총재의 꼬마민주당과 통합, 92년 또다시 세번째 도전에 나섰으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한다. 선거 다음날인 12월19일 『40년 파란만장한 정치 생활에 종막을 고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다』는 성명과 함께 정계에서 은퇴했다. 김총재는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고 돌아와 아·태재단을 설립, 일단 통일문제연구에 전념한다. 김총재는 94년 지방선거 결과가 야권의 승리로 돌아가자 7월13일 약속을 뒤집고 정계복귀를 선언, 국민회의를 창당한다. 그러나 4·11총선에서 기대에 못미치는 의석을 획득하자 다시 분당책임론과 집권 회의론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김총재는 제2야당인 자민련과의 공동집권구상을 통해 회의론에 대한 정면돌파를 시도하고 있다.<유승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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