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시대넘어 사회 주류로/‘운동권’ 꼬리표는 부담이자 성장 밑거름/법조·문화·정계 등서 민주적 사고로 활력80년 수십만의 대학생이 운집한 서울역시위 광주항쟁, 미 문화원 방화와 점거사건, 건국대 사태, 6월 민주화 시위와 6·29선언, 88년 통일대시위. 학생운동이 현대사에 남긴 자취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매 시기마다 집단적인 세를 과시하며 나타났던 학생운동은 특히 80년대 국내 정치·사회사의 중대 고비마다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 시기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77∼86학번의 소위 「운동권」학생들이 이제는 30대다. 이들은 1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올해 시내 개봉관에 선보인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라는 영화는 막 30대에 진입한 80년대 운동권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의 내용을 더욱 실감나게 만드는 것은 감독과 주인공이 모두 최루탄과 화염병속에서 20대의 젊음을 보낸 운동권 출신이라는 점. 감독 김응수(32)씨는 87년 서울대 총학생회 홍보부장을 지내며 6월 민주화시위 때 주요역할을 담당했고, 영화 주인공 김중기(31)씨는 대학가에 통일운동의 열풍을 일으켰던 88년 남북학생회담의 남측대표를 맡았었다.
현재 국립예술종합학교 연기과 졸업반인 김씨는 『우연한 기회에 예술인의 길을 걷게 됐지만 어떤 분야에서 일하건 치열한 학생시절을 보냈던 세대인 만큼 개인적으로 열심히 살고자 노력한다』고 말한다.
30대 운동권출신의 변신은 김씨의 경우처럼 문화계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법조 등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하나로 잡을 수 없다. 90년대 우리사회가 80년대와 다르듯 그들의 현재 모습 또한 당시와는 크게 다를 수 밖에 없다.
5공시절 학도호국단 체제를 무너뜨리며 84년 서울대와 연·고대의 첫 직선 총학생회장을 지낸 3인의 나란한 변신은 이채롭다. 서울대 학생회장 이정우(35)씨는 고시 3과에 합격한 후 변호사 개업을 했고 고려대 김영춘(35)씨는 93년 청와대 비서실 행정관으로 발탁됐다.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 전대협 전신인 전국대학생대표자회의 의장을 지냈던 송영길(34)씨도 94년 사법시험에 합격, 법조인의 길을 걷고 있다.
90년 이후 운동권출신 사이에 고시열풍이 불어닥쳤다. 그 결실로 지난해에는 사법시험합격자 502명중 운동권 출신이 100여명에 달했다. 85년 「깃발」사건으로 수감됐던 황인상(37·서울대 지리·80학번)씨, 89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임수경씨 방북사건을 주도했던 문광명(31)씨도 그들 속에 포함돼 있다. 올해초 파장을 일으켰던 사법연수원생들의 민주노총 파업기금 모금사건도 운동권 출신들이 한몫했다는 뒷얘기다. 이들은 이미 기존의 조직속에 활동하면서도 새로운 스타일의 법조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88년 서울대 총학생회 간부를 지낸 현직 검사 Y모(32)씨는 『운동권출신 검사들은 대체로 소외계층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같다』며 『이들의 사회의식이 유달리 강한 만큼 이같은 경향은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제도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긴 운동권도 다수. 이들은 4·19, 6·3세대를 이어 정치권의 주류로 거듭나기위해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정치권 진입의 신호탄은 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내고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옥고를 치르기도 한 김민석(34)씨. 최근 한보청문회에서도 상당한 활약을 보인 그는 지난 총선때 영등포을구에서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당선, 화제를 뿌렸다.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이성헌(36)씨나 고려대 학생회장 출신의 허인회(34)씨 등도 정치권입성을 위해 노력중이다. 의원비서관 등으로 암중모색하고 있는 숫자까지 합치면 수백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는게 정치권주변의 관측이다.
학생운동의 열정을 사회운동·시민운동으로 연장한 경우도 많다. 87년 이후 전대협 의장을 지낸 30대 초반 운동권들이 대체로 여기에 해당한다.
600여명의 회원을 규합, 각종 강연회와 이벤트를 벌이는 청년운동단체 「청년정보문화센터」는 87년 연세대 학생회장을 지낸 우상호(35)씨가 문을 열었고 지금은 89년 전대협 의장을 지낸 임종석(30)씨가 맡고 있다. 87년 전대협 1기 의장을 지낸 이인영(32)씨는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으로 자리를 옮겨 활동하면서 전대협의장과 간부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전대협 동우회」를 책임지고 있다. 환경운동연합이나 참여민주시민연대 등 기성 시민단체에서도 운동권 출신들이 다수 포진, 시민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해내고 있다. 전국연합의 기동민(31)씨는 『학생운동 시절의 순수성을 지켜 건강한 시민사회를 만드는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면서 『단지 90년 이후 학생운동의 약화로 대를 이을 사람이 없을까 걱정이다』고 말했다.
이에비해 대기업에 입사해 「경제일꾼」으로 변신한 핵심 운동권출신들은 다소 독특한 케이스. 94년 대우그룹이 특채 형식으로 대거 영입한 30대초반의 운동권 출신들도 이들의 일부이다. 「운동권을 데려다 어디에 쓰겠느냐」는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이들은 조직에서 활동한 경험과 민주적 사고로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냈다. 인터넷 동호회, 영어회화반 등을 꾸려나가는 등 활발한 사내 소모임 활동을 통해 조직내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평가다.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한 이들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낼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들에게 늘상 따라다니는 운동권이라는 꼬리표는 부담일수도 있고 성장의 밑거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경직된 기성체제에 민주적 사고와 활력을 불어넣어면서 우리 사회의 주류로 성장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김정곤 기자>김정곤>
◎운동권 출신 모임/‘전문가 네트워크’ 수십개/정체성 미비·20대 참여 저조로 고비
그들은 혼자보다는 같이 움직이는 것에 익숙하다. 운동권 출신 30대들은 무리지어 살아왔고 또 무리를 짓고 있다. 하지만 예전과는 무리짓기의 성격도, 방법도 다르다.
89년 전대협의장이었던 임종석(31)씨가 소장으로 있는 청년정보문화센터는 폐쇄적이고 중앙집중적인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난 좋은 예다. 영화 등산 인터넷 등 흥미있는 소모임이나 위원회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고 운영은 자치적으로 이루어진다. 정치성이나 엘리트주의를 탈피하려는 노력에 힘입어 94년 11월 설립 당시 100여명이던 회원이 지금은 600명에 이르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94년 절정에 이른 뒤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다른 30대 모임과는 달리 90년대 학번들인 20대들의 참여로 모임의 활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30대 운동권 출신들은 「전문가 네트워크」를 거미줄처럼 만들고 있다. 30대 네트워크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는 「두라」는 청년 전문인들간의 교류를 통한 공론형성을 목표로 90년 창립됐다. 그 뒤 전대협동우회(92년) 한국청년전문가연합(93년) 21세기 프론티어(94년) 포럼 2001(95년) 등 수십개의 네트워크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이들 모임도 힘들어하고 있다. 구체적인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20대들의 수혈도 이뤄지 않아 외형상의 회원수와 실회원수가 크게 차이나거나 조직이 노화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두라 회장 원선희(32)씨는 『무언가를 함께 해야 하지 않느냐는 본능적인 집단의식으로 만났지만 아직까지도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운동권 출신 30대들은 수년간의 「독립실험」중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윤순환 기자>윤순환>
◎운동권 지금 그는/국민회의 김민석 의원/“나는 진취적 현실주의자”
80년대 대표적 「운동권」인 국민회의 김민석(33) 의원은 97년의 자신을 「진취적인 현실주의자」라고 말한다.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라는 그의 말은 운동권에 몸담았던 30대의 오늘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총선에서 최연소로 당선된 김의원은 5공화국의 철권통치가 여전하던 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뽑혀 학생운동의 최일선에 나섰다. 김의원은 『당시는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았던 시절이었다』며 『어떻게 매일 술마시고 매일 울분에 젖고 매일 그렇게 열정적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총학생회장에 선출된 지 2개월만에 삼민투사건으로 구속기소돼 3년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던 김의원은 그 때 처음 공부를 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다양하고 깊이 있는 학문탐구를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는 그의 말은 운동권출신 30대의 공통의 회한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같은 아쉬움은 14대총선에서 민자당 나웅배 의원에게 석패한 이후 미국유학길에 오르는 계기가 된다.
김의원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에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본 적도,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며 『그러나 이제는 단란한 가정이라는 소시민적 행복의 가치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동갑내기 아내와 4살된 딸을 두고 있는 김의원의 솔직한 고백이다.
김의원은 그러나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해야할 일이 많다고 역설한다. 괄목할 만한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쳐야할 것이 많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운동권 출신 30대의 장단점을 묻는 질문에 김의원은 『민주주의적인 진보성과 조직력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말했다. 민주와 반민주의 구도를 벗어난 새롭고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선 낯설어하고 잘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권 출신의 30대가 흔히 갖는 냉소성에 대해 김의원은 동감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곱상한 얼굴에 조용한 말투의 김의원은 인터뷰중 딱한번 목청을 높였다.
『기성의 이념이 몰락하고 전통적 방법론이 폐기돼도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고 그런 의미에서 「잔치는 끝났다」는 선언은 틀렸다』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90년대를 개척하는 80년대 운동권」 김의원의 주장이다.<윤순환 기자>윤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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