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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형제들(다큐멘터리 세종대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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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형제들(다큐멘터리 세종대왕:2)

입력
1997.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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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 탄핵” 깊은 우애로 물리쳐/선대의 골육상쟁 피하려 돈독했던 삼형제/왕위에 오른 막내 극진한 보살핌속 호방한 맏형·마음여린 효령 천수 누려『전하는 마음대로 후궁을 두고 여인들을 처소에 출입시키면서 세자는 동궁에 여자를 들일 수 없다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태종은 세자의 상소문을 펼치는 순간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있을 수 없는 반항이었다. 태종 18년(1418년) 6월2일 세자는 결국 양녕대군으로 강등돼 경기 광주로 쫓겨났다.

세자시절 양녕은 걸핏하면 궁궐을 뛰쳐나가 술판을 벌이고 기생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요즘말로 하면 차관보(중추부사)까지 지낸 곽 선의 첩 어리를 빼앗다시피 몰래 대궐로 끌어들인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매와 개 사건」(12일자 26면 참조)이후 사사건건 세자를 고깝게 보던 태종으로서는 폐세자의 명분을 잡은 셈이었다.

양녕은 외모가 훤칠하고 기골이 장대했다. 결코 왕재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공부도 싫어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숭례문 현판을 쓴 것이 누구이던가.

어느 가을날, 태종이 감나무에 열린 감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까마귀떼가 몰려들어 마구 쪼아댔다. 태종은 까마귀를 쫓으라고 했다. 신하들은 지금 궐 안에서 까마귀를 잡을 사람은 세자뿐이라고 했다. 과연 세자는 내리 두번이나 까마귀를 활로 쏘아 떨어뜨렸다. 주변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태종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 호방한 모습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부정적 이미지를 보았는 지 모를 일이다.

태종의 선택은 확고했다. 세자를 새로 세우는 논의가 한창일 무렵, 이렇게 못을 박았다. 『효령(둘째)은 자질이 미약하고 성품이 굳센 데가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늘 빙긋이 웃기만 한다. 나는 중전과 함께 효령이 웃기만 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충녕(셋째)은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하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의견을 내는 것이 꼭 사리에 들어맞는데, 그게 다 내가 미처 생각 못한 것들이었다… 술도 적당히 마시고 그칠 줄 안다. 충녕은 훗날 큰 인물이 될 것이므로 임금자리를 맡길 만하다』

양녕은 어찌보면 사람답게 사는 길을 택하기 위해 왕위계승권을 미련없이 버렸는지 모른다. 할아버지는 나라를 세웠고 아버지는 그 나라를 이어받았다. 자신도 세자로 태어났다. 하지만 죽지 않으려면 남을 죽여야 하는 궁중의 비정한 음모가 역겨웠던 것이리라.

두 형에 대한 세종의 우의는 각별했다. 선대의 정권쟁탈 과정에서 아버지 형제들이 죽어간 것이 엊그제였다.

대군을 탄핵하는 의견이 분분하면 왕이라도 끝까지 버티기가 어려웠다. 1418년 10월, 즉위 3개월도 안 된 시점에 첫 시련이 닥쳐왔다. 신하들이 태종에게 반기를 들었던 방간(태조의 넷째 아들로 태종의 바로 윗형) 부자를 죽이라고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다. 세종은 『상왕(태종)께서 우애로 보호하시기를 20년이 넘는데 어떻게 갑자기 처리할 수 있겠는가』라며 간곡히 물리쳤다.

세종보다 세살 위인 양녕은 폐세자된 뒤에도 자주 말썽을 부려 수십차례나 탄핵을 받았다. 그때마다 동생이 감싸고 나서 69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세종은 호탕한 양녕이 신하들의 견제로 청주에 갇혀지내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평양여행을 제안했다. 단 『술은 석 잔까지만 하고 여자는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석달만에 돌아온 양녕을 환영하는 경복궁 경회루 연회장. 술잔이 오가는 동안 양녕은 약속을 지켰노라고 호언했다. 이 때 어디서 노래가 들려왔다. 『…홀홀이 붙잡을 수 없나니/끝없이 어디로만 가는 게요… 남포에 봄 물결 푸르거든/님이여, 뒷기약을 저버리지 마소서』 고려의 최고시인 정지상의 시 「님을 보내며(송인)」였다. 노래부르는 여인은 정향. 동생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꿈같은 석달을 함께 보낸 애인이었다. 떠나올 때 훗날을 기약하며 이 시를 써준 치마까지 그대로 입고 나왔다.

세종의 짖궂은 장난이었다. 평안도 관찰사에게 미리 명을 내려 형님을 「파계」토록 한 것이다. 양녕도 세종처럼 자식복이 많아 10남 14녀를 두었다.

세종은 한 살 위인 효령에게도 극진했다. 마음이 여렸지만 충직하고 깨끗한 효령에게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별장에 들러 정자이름을 희우정이라 짓고 위로연을 베풀기도 했다. 효령은 불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하면서 성종 17년(1486년)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실의 큰어른으로 존경받았고 7남2녀를 남겼다.

삼 형제의 길은 각각 달랐다. 그러나 우애만은 한결같았다. 물론 그 축은 세종이었다.

◎돋보기/태종 인간분석/불같은 성격… 양녕 폐세자후엔 부정 눈물

태종은 불같은 성격을 지녔다. 정치적 라이벌인 정몽주,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과 그 옹위세력인 정도전·남은 일파, 처남인 민씨 4형제에 사돈인 영의정 심온까지, 반기를 들거나 그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하나같이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흐름을 아는 인물이었다. 사려깊고 멀리 내다볼 줄 알았다. 14년간 세자 자리에 있으면서 정사를 대신하기도 했던 양녕을 내치고 셋째를 후계자로 삼은 것은 앞으로 역사의 무대에는 충녕이 가장 적합하다는 냉철한 판단에서였다. 물론 자기를 꼭 빼닮아 호방하고 거친 양녕이 사뭇 껄끄러운 반면, 고분고분하고 문인적인 충녕에 더 정이 갔을 수도 있다.

강렬한 성격의 아버지라면 가질 수 있는 편향이다. 그러나 충녕을 세자로 정한 데는 동기간에 우애하고 다정다감한 셋째가 왕이 돼야만 자기 대에서와 같은 골육상쟁이 없을 것이라는 깊은 배려도 깔려 있었다.

태종, 그 호랑이같은 사나이도 세자를 폐하고 나서는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 양녕을 경기 광주로 떠나보내면서 『너야 충녕(후일 세종)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일생 편히 잘 지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피바람을 부르며 새 왕조의 기틀을 다져야 했던 태종의 가슴에도 아버지의 정은 뛰고 있었다.

◎세종어록

『임금이 덕이 없어 정치가 잘못되면 하늘이 재앙을 내려 징계한다고 들었다. 내가 변변치 못한 몸으로 백성 위에 있으면서 밝음으로 비추지 못하고 덕으로 편안케 해주지 못하여 홍수와 가뭄에 해마다 흉년이 그치지 않았다. 백성들은 고통에 신음하고 부모 자식이 뿔뿔이 흩어지는데도 국고는 텅 비어 구제해줄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번 4월에 다시 가뭄이 들었다. 조용히 잘못을 살펴보니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 가슴 아프고 부끄러워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세종실록 20권 세종 5년 4월25일조).<이광일 기자·제자 안상수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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