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묘지 261억원 들여 ‘민주성지’ 새단장/구 상무대 터·도청은 기념공원·광장으로/목포·화순 등 곳곳에 표지석 등 설치계획5·18민주화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됨에 따라 정부가 최초로 주관하는 행사가 개최될 5·18신묘역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93년 5월13일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망월동 5·18묘역을 성역화하고 ▲구상무대 부지(현 상무신도심)에 5·18기념공원을 조성하며 ▲전남도청을 이전한 후 그 자리에 기념광장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망월동 구묘역을 신묘역으로 이전하는 5·18묘역 성역화사업은 94년 11월 첫 삽을 뜬 지 2년 6개월만인 16일 영령들의 혼을 달래는 진혼예술제를 치르고 완성됐다. 「5·18묘지」로 이름 붙은 이 묘역은 구 묘역 동쪽 500여m 떨어진 곳에 5만750평 규모로 조성됐으며 위령탑 등 각종 상징물도 세워졌다.
무등산을 바라보는 양지 쪽에 자리잡은 4단계 층구조의 묘역에는 5·18희생자 묘지 784기가 안치된다. 이 사업에는 국비와 시비 261억원이 들었으며 광주시민을 비롯 국내외 각계 인사 1만2,000여명이 헌수한 「민주나무」가 심어졌다.
신묘역의 상징은 40m 높이의 조형물. 두 손을 오무려 감싸쥔 형상의 탑신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대리석으로 마감, 상승감과 진취적인 힘을 표현하고 있다. 상층부 스테인리스 재질의 계란모양 조형물은 5월 영령들의 부활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고 있다.
상징조형물 좌우에는 「대동세상」과 「무장항쟁」이라는 제목의 가로 4.6m, 세로 2.5m, 높이 3m 크기의 군상이 설치됐다. 이 군상들은 80년 당시의 상황을 압축한 것이다.
이밖에 전통 한식구조로 된 정문에 들어서면 각종 집회와 행사를 할 수 있는 민주광장과 참배광장이 펼쳐진다.
한편 94년 광주의 신도심인 구상무대 부지에 공사를 시작한 5·18기념시설과 공원시설은 98년말 완공된다. 80년 당시 무고한 시민은 물론 항쟁 참여자들이 계엄군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했던 구 상무대 법정과 영창은 원래 위치 인근에 조성될 「주제공원」으로 옮겨져 역사 체험장으로 활용된다.
전남도청 부지에 기념공원을 조성키로 한 계획은 도청이전 문제가 잠잠해지면서 다소 지지부진하다. 전남도는 17주년 행사에 맞춰 정문 민원실 옆에 4m높이의 「영원히 꺼지지않는 불꽃」이란 조형물을 설치했다.
「이 곳 도청은 80년 5·18민중항쟁 최후의 결사 항쟁지였으며 광주의 상징이었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과의 최후의 항쟁에서 시민군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수많은 시민군들이 연행되었다」는 내용의 한글과 영문, 일문으로 표기한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전남도는 또 목포역에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화순 너릿재, 해남우슬재 등 도내 곳곳에 소규모 기념공원과 「5월 격전지」에 현장 표지석을 설치할 계획이다.<김종구·송두영 기자>김종구·송두영>
◎17주년 맞은 광주/5·18,민주제전으로 새 자리매김/국가기념일 지정후 첫 행사/경건하고 다채로운 기획들로 힘겨운 화해의 움직임
광주시민들에게 「5·18」은 그날의 비통함을 누르고 상처와 아픔을 되새기는 날이었다. 적어도 광주의 명예회복과 가해자들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올해 5·18을 맞는 광주시민들의 감회는 전과 다르다. 정부가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가해자들을 단죄, 역사 속에 올바른 자리매김을 하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듯 매년 5·18이면 금남로를 뒤흔들던 시위함성과 화염병·최루탄 공방은 사라지고 대신 추모음악제 등 경건하면서도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또 예년과 달리 당국이 시민들의 참여 폭을 넓히고 기념행사의 전형이 될 수 있도록 행사기획을 공모하는 등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정치성이 배제된 채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5·18이 침울했던 역사의 뒤안길에서 벗어나 새롭게 부활하면서 민주제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또 5월 영령의 한과 아픔을 간직한 망월동 5·18묘역이 새롭게 조성되면서 피해자인 광주시민이 화해의 악수를 건네는 「큰 자세」로 5월정신을 승화해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변화이다.
그러나 이같은 여러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광주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것 같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사면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시민들은 정치권이 광주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또 진압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정치재판으로 시작해 개인의 단죄로 마무리되는 바람에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가 단지 보복을 원하는 차원으로 왜곡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5·18 17년째를 맞는 광주는 변하고 있고 또 변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의 가슴속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남아있고 5월 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흐느낌도 계속되고 있다.<안경호 기자>안경호>
◎대통령 망월동 참배 언제쯤…/‘문제 해결’로 해석될까/논란끝에 올해도 무산
『5월 영령 앞에 고개 숙여 참배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 『완전한 광주문제 해결없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대통령의 망월동 5·18묘역 참배는 있을 수 없다』
5·18 17주기를 앞두고 광주에서는 현직 대통령의 망월동 참배문제를 둘러싸고 학생들과 재야·5월단체, 광주시 사이에 뜨거운 공방이 벌어졌다.
문민정부 출범과 동시에 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김영삼 대통령의 망월동 묘역참배가 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의 반대시위로 93년과 95년 두차례나 무산된 이후 2년만의 논란이었다.
이 찬반논쟁은 5·18기념재단이 5·18의 국가기념일 제정에 맞춰 광주가 대승적 차원에서 화합과 용서의 모습으로 다가서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현직 대통령 초청문제를 거론하면서 촉발됐다.
기념재단과 시청관계자들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의 단죄가 이루어졌고 기념행사가 정부주관으로 치러지는 만큼 대통령의 행사참석과 망월동 참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야단체는 『김대통령의 5·18묘역참배는 전·노씨의 사면을 위한 정략적 의도가 숨어있다』며 『완전한 광주문제 해결 의지가 없고, 한보사태와 김현철씨 비리 등으로 궁지에 몰린 대통령을 5월영령 앞에 서게하는 것은 희생자들과 광주시민에 대한 배신행위』라며 맞섰다.
갈등양상이 계속되자 양측은 이 문제를 백지화하는데 합의, 김대통령의 망월동 참배는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김대통령의 망월동 참배는 현직 대통령으로서 처음이라는 정치적 상징과 의미를 가진 만큼 끊이지 않는 논란의 대상이 돼왔다. 광주시민들은 김대통령의 망월동 묘역참배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직 앙금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의 망월동 참배가 곧 광주문제의 완전한 해결이라는 등식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안경호 기자>안경호>
◎5·18과 DJ 그 불가분의 관계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5·18은 말그대로 「불가분의 관계」다. 그에게 사형선고까지 받게 한 5·18은 몇년뒤 그가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발판 역할을 해주었다.
사형을 선고받고 사면된 김총재는 85년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민추협 공동대표를 지내면서 발표한 5·18성명에서 희생자 명예회복 및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12대 국회에서는 5·18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하는 등 광주문제를 정치쟁점화 하는데 노력했다. 13대 국회에서 황색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이 된 평민당 당수가 되자 88년 11월 국회 광주특위를 구성해 청문회가 열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광주문제가 제자리를 잡아가면서 김총재가 5·18을 거론하는 수위는 서서히 낮아져 갔다. 광주문제에 굳이 나설 필요가 없어지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김총재가 공세에 앞장설 경우 5·18이 단순한 광주지역의 문제로만 남게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또 정치적으로는 그를 위시한 정당이 호남정당으로 고립되는 역효과를 불러와 비호남지역에서의 「반 DJ정서」가 고취될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김총재는 의식적으로 5·18관련 인사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 92년 이후 3년간 광주를 방문하지 않았고 지난해 5·18기념식에도 본인은 물론 대리인도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95년 6월 지자체선거 뒤 정계복귀를 앞두었을 때와 지난 15대 총선이 끝난 직후, 대선을 6개월여 앞둔 16일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가 도래하면 김총재는 광주를 방문하거나 망월동 묘역을 참배한 뒤 정치 구상을 내놓았다. 시기가 우연인지는 몰라도 김총재에게 5·18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맺어져있다.<염영남 기자>염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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