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묘지에 40여m의 추모탑이 우뚝 솟아올랐다. 5만평이나 되는 널찍한 터에 조경도 솜씨있게 하고 구조물들도 구석구석 정성이 배어있다. 망월동 구묘지로 가는 길처라 늘 지나다녔던 곳인데 이렇게 꾸며놓고 보니 이런데도 있었던가 싶게 주변경관이 짜임새가 있고 묘역이 여간 아늑하지 않다.이제 5·18희생자들은 이런 자리에 편안히 잠들게 되었다. 항쟁 당시에는 가족들이나 친지들이 공포와 분노에 떨며 처참하게 훼손된 주검을 손수레에 실어다 묻었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는 시신이나 5월27일 도청함락 때 희생된 사람들은 청소차에 실어다 묻었다. 그런 묘지가 민주성지로 세계적인 각광을 받자 돈으로 유혹하며 묘를 파내게 하는 등 그들은 죽어서까지 수모를 겪었다.
그 사이 전두환·노태우씨 등은 내란과 군사반란 죄목으로 법의 심판을 받았으며 5월18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고 앞으로도 후속조치가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역사는 제 길로 가는데 한쪽에서는 그들에 대한 사면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 대권을 맡겠다는 대선주자들이다. 사면을 하겠다고 잘라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경상도 쪽 전라도 쪽 눈치를 살피며 어정쩡하게 우물거린다. 지도자는 대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옳은 소리는 받아들이고 그른 소리는 바로 잡아야 한다.
『나는 적어도 내 임기 중에는 사면을 않겠다. 당신들은 그들이 광주에서 얼마나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모른다. 그 진상은 이러이러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법정에서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지금 반성을 한다 하더라도 감형을 받으려는 술수로 밖에 볼 수 없다. 저런 사람들을 사면하면 역사가 바로 서지 않는다』
적어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라면 이래야 할 것이다. 실제로 광주·전남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때의 참상을 잘 모른다. 항쟁 당시에는 고정간첩들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예비군훈련장에서까지 요란을 떨었고, 그뒤 12년동안은 광주사람들의 성난 모습과 싸우는 모습만 텔레비전에 비췄다. 그런 텔레비전만 본 사람들의 여론은 그릇된 정보로 잘못 형성된 여론이다.
이 정부 들어선 뒤 광주를 방문한 어느 총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전에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광주에 오게되면 광주항쟁 유가족들이나 부상자들은 전날 한밤중에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잠자리에서 끌려나와 닭장차에 실려서 멀리 강원도나 충청도 산골짜기에 내팽개쳐졌습니다. 전 같으면 지금쯤 울고불며 오고 있을 것이고 총리께서 여기를 떠나신 다음에나 광주에 당도했을 것입니다. 항쟁당시에 쌓인 울분보다 십수년간 이렇게 쌓인 울분이 더 큽니다』
그랬더니 그는 광주사정을 대충 알고있는 분이라 여간 민망스러워하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5·18직후 4개 기관이 동원되었던 합동수사본부는 관련자들을 3,000여명이나 잡아다가 항쟁당시 총을 갈기던 바로 그 서슬로 시퍼렇게 수사를 했지만 간첩이 사주한 흔적은 실오라기만한 꼬투리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왕창 잡았구나 했더니 정말 맥풀리는 걸』 이것은 공안관계수사라면 내로라하던 육군본부 특수수사대 요원이 한 말이다. 그때 그의 입가에 흐르던 냉소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요즘 대권주자들이 사면을 입에 올릴 때마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을 떠올린다. 전·노씨를 단죄한 김대통령의 결단을 정치적 역학관계로만 보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 이쪽 저쪽 눈치를 살피며 사면을 우물거리는 저런 사람들이라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지금 저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하나회 척결이며 통합선거법, 금융실명제실시 등 당대정치가들 가운데 그런 결단을 내릴 사람이 몇이나 될지 알 수 없다. 처음 광주항쟁을 역사에 맡긴다고 했던 것은 금융실명제에 시치미를 떼었다가 전격적으로 실시했던 것처럼 그런 수순으로 볼 수 있다. 지금 남미에서 민주화가 지지부진한 것은 칠레나 아르헨티나에서 보듯이 군부를 제압하지 못한 탓이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들은 역사를 내다보는 경륜과 소신이 범인들과 조금은 달라야 한다. 그릇된 여론에 영합하는 것은 그릇된 권력이나 돈에 영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더구나 차기대통령한테는 남북문제를 두고 목숨을 건 결단을 내려야할지 모를 만큼 큰일이 기다리고 있다.<전남대 교수>전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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