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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섬과 남이/류동희 전국부 차장(앞과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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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섬과 남이/류동희 전국부 차장(앞과 뒤)

입력
1997.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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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지로 유명한 강원 춘천시의 남이섬은 조선 예종때 역모죄로 처형된 남이장군의 시신 일부가 묻힌 곳이라기도 하고 그가 젊은 시절 무예를 닦은 곳이라기도 한다.남이의 비극은 혜성의 출현에서 비롯됐다. 예종 즉위초 그는 이를 두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이 들어설 징조』말했다. 이 말은 당시 병조판서에서 물러나 있던 그가 역모를 꾀한 증거로 고발됐다. 하지만 그가 역모를 꾀한 구체적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다.

남이의 친구이자 고발자인 유자광은 남이의 시귀중 「남아이십미평국」의 「평」을 「득」으로 왜곡,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게 했다고 야사는 전한다. 이처럼 심증과 또 혹독한 고문으로 자포자기적 심정에서 나온 자백을 근거로 남이는 처형됐다. 이렇다면 그는 「음모」의 희생자다.

태종의 외손으로 예종에게 외당숙이 되는 남이는 세조가 「차세대 지도자」로 왕족인 구성군과 함께 발탁했던 인물. 세조의 마지막 인사에서 구성군은 영의정, 남이는 병조판서였다. 당시 남이의 나이 불과 27세. 자신의 「정권창출」을 도왔던 한명회 등 「위험한 신하」를 고스란히 남겨두고 죽음을 맞게된 세조는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피가 섞인 「똑똑한 젊은이들」로 「세대교체」를 기도했던 것이다. 파워게임은 필연적이었고 이른 출세로 「교만하고 경박한」 남이가 정치적 패자가 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유자광 역시 세조의 총애를 받던 「젊은이」. 그는 『나라를 우정에 앞세웠다』라고 말했지만 고발의 정치적 수혜자들마저 『친구를 배신했다』며 그를 경원했다. 남이는 문초중 한명회를 끌어넣으려 애썼으나 정승인 강순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남이의 「정치적 순장자」가 된 78세의 강순은 『젊은 사람 잘못 사귀어 이 꼴이 됐다』고 탄식했다던가.

헤일―혜성의 출현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한보사태」 역시 먼 훗날 두고 두고 「역사」로 거론될 것이다. 앞으로 쓰여질 「역사」가 궁금하면 이미 쓰여진 비슷한 역사를 뒤적여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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