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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자아가 있나/양창수 서울대 교수·법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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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자아가 있나/양창수 서울대 교수·법학(한국논단)

입력
1997.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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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서 바른말 해 자살택한 은행 임원/강요없이 자신원칙 지킬 ‘개인의 존엄’은 어디에요즈음은 어디를 가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신문은 언제나 그들의 동정과 언행과 과거 행적을 적은 기사를 싣고 있다.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화제가 달리 없는 것이 아닌데도, 그 사람들의 지역연고가 어쩌고 당내 역학이 어쩌고 아버지가 어쩌고 경제에 대한 안목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이렇듯 대단한데도 여전히 우리 정치는 3류라고도 하고 그것도 못되어 4류라고도 하니, 무언가 큰 문제가 있음에는 틀림없다. 그 열렬한 관심이라는 것이 반드시 공동체가 되어가는 모습에 대한 시민으로서의 책임의식에서 우러나오는지에는 의문이 없지 않다. 혹시 이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저 먼 곳에서 「인물」들이 벌이는 싸움에 대한 구경꾼으로서의 흥미나 권력의 귀추에 따른 파당적 이해에서 오는 것이나 아닌지 물어보게 된다. 어쨌거나 이렇게 획일적인 관심의 집중에서 오히려 정신의 황량함이나 편협함 같은 것을 엿보게 되는 것은 웬일일까.

사람들은 아마도 벌써 잊어 버렸을지 모르지만, 얼마 전에 한보청문회에서 증언대에 섰던 전직 은행 임원의 자살 같은 사건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상황에 대하여 음미해 보아야 할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가 여겨진다.

사람이 자살이라는 행위에 이르게 될 때까지 그의 내면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누구라서 다 알 수 있으랴. 그러나 신문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그 사람은 한보청문회에서 대출을 둘러싼 외부의 개입에 대하여 사실을 말하였고 그것이 그가 몸담았던 은행, 그리고 유관기관에 「누를 끼친」 결과가 되었음을 괴로워하여 자살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평소의 업무처리에 있어서 적어도 남보다는 공정하고 사사로운 욕심이 적었다고 한다. 결국 진실을 밝힌 것이 선량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말이 된다.

문제는, 어째서 우리 사회에서는 진실을 공적으로 밝히는 일이 선량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버리게 할 만큼 괴로워할 일이 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어느 부모도 교사도 자식에게 또는 학생에게 거짓말을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그 가르침은 실제로는 어느 범위에서 유효할까. 우리는 몸이 아파도 아프지 않다고 하면서 열심히 근무하는 사람을, 친구 집을 방문하였을 때 배가 고파도 고프지 않다고 하면서 친구 어머니가 밥을 차려 주려는 것을 막는 사람을, 원하는 것을 솔직히 말하기보다는 말하지 않는 사람을 「착하다」고 한다. 어찌보면 거짓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도덕적 문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더욱이나 나의 「윗사람」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애써 주장하고 있는데, 아랫사람인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밝혀 말하는 것은, 곧 그 윗사람이 거짓증언을 하였다고 고발하는 결과가 된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또 하나의 덕목, 즉 윗사람에의 공순에 반하는 것이다. 특히 그 윗사람이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거나 적어도 고락을 같이하여 친한 사이였다고 하자. 그 때에 윗사람의 주장에 반박하여 사실을 말하는 것은 소위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 아닐까. 이러한 경우에 자기를 억누르고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일종의 자기희생으로서 칭송받아야 될 일이라고 하여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 보면 우리는 어떠한 기본적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우리 각자에게 남에게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기의 원칙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켜야 하는 덕목이 있는가. 바꾸어 말하면 과연 우리에게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없다면 정치 또는 권력의 목적으로 헌법이 내건 기본가치, 즉 「개인의 존엄」이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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