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 등 우려없을때 신체구금 부당/판사심문 피의자에 방어기회 준것판사는 판결로만 말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마음 한 구석에 접어 두고 이 글을 쓰기로 한 것은, 영장실질심사제의 의미가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누군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부정하지 않으면 이 제도의 존폐가 문제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이다.
또 이 제도의 시행에 즈음하여 구속의 기준 등 형사재판의 실무관행이 크게 바뀌고 있어 이러한 변화를 널리 알림으로써 장래 피의자나 피고인들이 법률에 의하여 주어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종래 검사가 형사피의자에 대하여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판사는 검사가 제출한 수사기록만을 검토하여 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영장 발부요건이 기록상 명백한 경우란 상상하기 힘들다. 오히려 수사기관이 과욕을 부려 무리한 수사를 하는 경우일수록 기록이 완벽하게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피의자를 직접 만나 보기 전에는 구속의 요건이 명백한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또 피의자의 입장도 그렇다. 범행을 자백하든 부인하든 영장을 심사하는 법관을 만나 무엇인가 하소연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수사기관으로서도 그러한 기회를 주는 것이 신체구금이라고 하는 중대한 불이익을 당하게 될 피의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개정 형사소송법 제201조의 제1, 2항은 『구속영장을 청구받은 지방법원 판사는 구속의 사유를 판단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피의자를 심문할 수 있다』고 새로이 규정함으로써 영장을 심사하는 법관이 직접 피의자를 만나 변명을 들어 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과거에도 형사소송법상 증거 인멸이나 도망의 염려가 없는 경우에는 피의자를 구속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검찰은 현재까지도 수사결과 나타난 피의사실에 대하여 형벌을 과한다는 생각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해 오고 있다. 법원도 과거에는 검찰의 이러한 방침을 그대로 받아 들여 영장업무를 처리해 왔다. 이렇게 발부되는 구속영장은 혐의사실이 중하거나 죄질이 불량한 피의자에 대하여 즉시 신체구금의 고통을 과함으로써 피해자의 보복감정을 만족시켜주고 범행에 대한 사회의 공분을 해소하는 기능을 해 온게 사실이다.
어쩌면 범죄혐의자를 대로상에 세워 놓고 처형하는 군중에 의한 인민재판이 원시적 법감정에 가장 충실한 제도일지도 모른다. 피해자나 성난 군중에게는 재판을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을 뿐 아니라 재판이란 번거롭고 짜증스러운 절차일 뿐이다. 이러한 인민재판은 멀리 아프리카쯤에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인민재판이 자행되어 온 것이나 진배 없다. 범죄혐의자는 도주 우려와 전혀 관계없이 곧바로 형 집행의 개시를 의미하는 구속상태에 놓여졌고, 일단 구속되면 장기간 구금이 계속되었다. 문명국가에서 재판도 받기 전에 형벌이 과해지고 있다고 하면 누가 이를 사실이라고 믿겠는가.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것이 과거 우리 형사사법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의자의 구속은 형사재판의 처음이자 끝이었다. 형벌의 집행이 개시된 마당에 형벌을 과하기 위한 절차인 형사재판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공판중심주의라는 것도 공염불에 불과하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범행을 부인하면 고소인 등을 증인으로 소환하게 되나 떳떳하지 못한 고소인일수록 자취를 감춘다. 검찰도 피의자를 구속하는 것이 목표이지 증인을 법정에 출두시키는데는 별 관심이 없다. 필연적으로 재판은 공전되고 피고인의 구금은 장기화할 수 밖에 없다. 많은 피고인이 자포자기에 빠져 범행을 부인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영장실질심사제는 형사사법의 연골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흉악범을 무죄 방면하자는 것도 아니다. 피의자나 피고인이 도주할 우려가 없다면 불구속 상태로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재판결과 유죄로 인정되면 그 죄에 상응한 엄정한 형벌을 과하자는 것이다. 뺑소니 운전사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고 하여 법원에 비난의 화살이 빗발치는 분위기가 계속되는 한 우리나라는 법문화 미개국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다만 불구속 재판을 받은 악질적 범죄자에 대하여 터무니 없이 가벼운 형이 선고되었다면 그에 대한 비난은 마땅할 것이다.<서울지법 동부지원 형사단독판사>서울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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