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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7년만의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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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7년만의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입력
1997.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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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사랑의 아름다운 노래/희망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역설적 희망 그려정호승(47) 시인이 오랜만에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창작과비평사간)를 냈다. 네번째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90년) 이후 7년만이다.

그는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이었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79년)에 실린 「맹인가수 부부」에서 노래했듯 어두운 시대를 줄곧 살아오면서도 「세상 모든 기다림」의 사랑을 시에 실었다. 새 시집의 작품도 대부분 사랑노래다. 그러나 앞서의 이런 기다림의 사랑이 아니라, 「실패한 사랑」의 노래들이다.

「사랑을 가르치는 시대는 슬프고/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시대는 슬프다」(「세족식을 위하여」중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게 만든 구체적 원인이야 어머니의 입을 빌린 「이 병신 같은 자식아 지금까지/ 그런 걸 여자라고 데리고 살았나」(「수의를 만드시는 어머니」중에서) 같은 다른 몇몇 시귀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독자들은 다만 사랑에 실패했지만 「누더기가 되고 나서 내 인생이 편안해졌다/ 누더기가 되고 나서 비로소 별이 보인다」(「누더기별」중에서)는 시인의 겸허한 몸 낮추기에 공감하는 것이다. 「내려가자 다시는 발자국을 남기지 말자/ 내려가는 것이 진정 다시 올라오는 일일지라도/…/내려가자 사람은 산을 내려갈 때가 가장 아름답다/ 산을 내려갈 때를 아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강요당하지 말고/ 해방되기 위하여 속박당하지 말고/ 내려가자 북한산에도 사람들은 다 내려갔다」(「산을 오르며」중에서).

이처럼 「때로는 실패한 사랑도 아름다움을 남긴다」(「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중에서)라는 인식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손놓을 수 없게 하는 연유가 된다. 실패한 사랑의 고통을 견디고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 우리는 희망이 없이도 열심히 살 수 있다」(「칼날」중에서)와 같은, 역설적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정신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까닭」중에서) .

그래야 길이 보인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봄길」 전문).

그는 『그간 시를 쓰지 않고 살아온 날들이 후회스럽지만 한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이라고 밝힌다.<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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