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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선원칙’ 원점서 시작하자/손일근 언론인(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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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선원칙’ 원점서 시작하자/손일근 언론인(특별기고)

입력
1997.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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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은 다선 우선주의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정당마다 당직 안배나 국회요직의 배분에서, 심지어 정부의 조각에 있어서도 이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선우선은 대의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민주정치에 있어서 당연한 현상이며 선진제국에서도 거의 전통이 되어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우리의 정치 현실은 어떠했던가. 선수가 곧 의정활동으로 쌓은 「경륜의 온축」을 말한다기 보다는 일부 소신없는 정치인들의 작태에서 보듯이 행려자의 「때 더덕이(구재)」같은 것 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정치적 암흑기라고 할 만한 군사독재시대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온갖 음모, 공포, 공작정치가 횡행하는 가운데 금권선거가 판을 치고 관제야당, 공권여당까지 등장하는 등 정상적인 정치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런시절에 다선의 기록을 유지했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오욕의 나이테」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국민들이 생각만해도 분통이 터지고 몸서리 치고 구역질 나는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소신이나 정견과는 상관없이 당선 가능성을 좇아 바퀴벌레처럼 눈치껏 이 당 저 당을 넘나드는 이른바 「철새 정치가」, 야당에서 여당으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변신을 밥먹듯 하며 오로지 의석만을 유지하기 위해 줄을 서던 몰염치 「다선」도 한 둘이 아니다.

14대만해도 300명의 재적의원 가운데 65명이 임기중에 당적을 옮겼다. 5명 가운데 한사람 꼴로 당적을 바꾼 셈이다.

2년반 동안에 네번이나 당을 옮긴 사람도 둘이나 되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들인가. 요새 흔히 회자되는 말로 「정치인은 정치자금의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들 한다. 「보험성」이건 「대가성」이건 남의 돈 얻어 쓰며, 국정은 뒷전에 돌린채 「다선」기록 쌓느라고 동분서주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 정치인이라는 이야기이다.

얼마전 「경실련」에서 공개한 의정활동 평가보고에 따르면 종합평점순위 20위까지에 초선이 9명이며, 3선이상은 3명밖에 들지 않았다 한다.

다시 말하면 「선수」가 낮을수록 의정활동이 진지하고 활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의정활동에 있어서 「다선」이 곧 「다능」이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 숫자만으로 진짜 유능하고 경륜 깊은 다선의원을 평가절하 하거나 일률적으로 매도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군부집권이후 절필하다시피 했던 필자가 「부작위의 자괴」를 통감한 나머지 제언하는 것이니 액면대로 믿어도 될 것인다.

문제는 최소한 「다선」을 훈장처럼 위장하거나 「선수」를 정치인의 능력을 재는 잣대로 삼아서는 결코 안되겠다는 사실이다.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시험을 공정하게 관리하기 위해 답안지의 응시자 이름을 가린채 채점한후 성적순에 따라 답안지를 골라 합격자를 발표하는 경우를 본다. 그렇지 않고, 채점도 하기전에 응시자 이름을 먼저 열어 본 후 「다선」이니 어쩌니 해서 가점을 배려하는 따위는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이 나라 민주의정의 진짜 「선수」는 이제부터 셈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 동안 발들여 놓기를 꺼렸던 알맹이 있는 신인들의 등장을 위해서도 「다선위주」를 과감히 탈각해야 한다.

요즘 나라 안이 온통 시끄럽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어떤 의미에서 고비용의 정치구조를 뜯어 고치고 참신한 정치풍토를 정착시킬 수 있는 호기이기도 하다.

새롭고 건강한 토양위에서만이 민주주의의 좋은 나무가 자랄 수 있을 것이며 곧고 바른 나이테가 그어 질 것이고, 또 향기있는 꽃이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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