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흔적이런가… ‘돈차’와 천불천탑/엽전모양 다꾸러미 독특/약제로 사용되다 생산 중단/고려때 주둔 원문화 영향설전남 영암군 강진군 보성군은 국내 최대의 차생산지다. 봄이면 골짜기마다 융단처럼 깔려있는 차밭을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으로 몰려든다. 특히 부근 화순군에는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가 있어 차밭을 둘러본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일대에서 해방직후까지 생산·판매된 「돈차」가 운주사 석탑과 석불처럼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차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그럴듯한 이야기거리가 되고 있다. 와불 등 특이한 양식의 운주사 석불과 석탑이 고려를 정복한 원나라가 일본을 침공하기 위해 이지역에 주둔시켰던 몽골연합군이 조성한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차 또한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돈차는 지름 3∼5㎝, 두께 1㎝ 크기로 찻잎을 동그랗게 압축시켜 만든 후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꾸러미처럼 꿸 수 있게 만든 차. 엽전 처럼 생겼다고 「돈차」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해방후 전라도 장터에서는 「청태전」이나 「전차」라는 상표가 붙은 돈차를 볼 수 있었다.
돈차를 끓일 때는 차와 함께 대추나 말린 감껍질도 같이 넣어 끓였다. 황갈색인 돈차는 끓이면 진한 황색으로 쓴 맛이 강하지만 묽게 타면 녹차 맛이 낫다고 한다. 장날이면 장터에서 100개씩 꾸러미에 꿴채 팔리던 돈차는 차라기 보다는 감기나 배 아플 때 한두개씩 불에 살짝 구운 후 끓여 마시면 아픈 것이 낫던 「약제」로 생각됐다. 또 몇년전에는 한국제다 등 몇몇 차생산회사에서 돈차를 대량 생산했으나 찾는 사람이 없어 지금은 사라졌다.
돈차가 사실은 몽골의 차라는 주장은 유목민족이 대부분 그렇듯 차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몽골연합군이 천혜의 차생산지인 이곳에 주둔하면서 휴대하기 편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동전모양의 차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리에서 비롯됐다.
동국미술인회 김익홍씨는 지난 93년 몽골 남쪽지방을 여행할 때 목동들이 말안장에 노끈에 꿴 차꾸러미를 달고 다니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말해 이같은 추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김씨는 몽골여행중 현지인들로 부터 즉석에서 짠 말젖에 이 차 한덩이를 넣고 끓인 마유차를 대접받았다며 강진 보성 등 이 지방에서 생산됐던 돈차는 바로 몽골인들의 풍습이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단정했다.
김씨는 또 운주사 석탑의 원반형 옥개석탑이나 마름모꼴 무늬에 네잎 꽃무늬가 들어있는 문양, 빗줄기같은 수직선 무늬들은 몽골과 티베트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들인데다 석불의 표정과 이미지도 몽골 곳곳에 흩어져 있는 불상의 그것과 흡사하다며 이들 석탑과 석불도 몽골로 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씨는 특히 석탑과 석불은 이곳에 장기주둔했던 몽골연합군 장수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원나라는 당시 일본을 공략하기위해 몽골 미얀마 네팔 티베트 군사로 조직한 몽골연합군을 보성만이 가까운 이 지역에 수십년간 주둔시켰는데 이때 숨진 주둔군 장수들의 무덤을 몽골식으로 조성했다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고건축 전문가로 문화재전문위원인 신영훈씨도 운주사 석탑과 석불이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신씨에 따르면 일본 침공에 두차례나 실패한 몽골연합군 군사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하면서 운주사가 있는 부근에 집단 거주했다. 이들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이곳의 점판암을 쪼개 석탑과 불상을 조성했다는 게 신씨의 견해다.
또 미얀마불교대학서 불교미술을 전공한 문화재전문위원 윤열수(가천박물관학예실장)씨도 『운주사에서 볼 수 있는 원구형 석탑은 미얀마탁발승들이 지니고 다니는 바리를 올려 놓은 모습과 같으며 석탑에 새겨진 X자 무늬는 몽골인들이 천막(겔)을 지을때 사용하는 X자 무늬와 동일하다』고 말했다. 윤씨는 또 『네잎모양의 꽃무늬 또한 몽골지역 사찰의 문살과 난간에 그 원형이 남아있다』고 말하고 『몽골연합군을 구성했던 몽골과 미얀마의 문화가 운주사 석탑과 석불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학자들은 우리나라 차문화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쇠퇴하게 된 것은 몽골의 침략과 병자호란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침략에 성공한 몽골족이나 만주족이 품질좋은 조선차를 대량으로 착취하는 바람에 차농민들이 차생산을 중단한 경우가 많았다는 주장이다.
병자호란 이후 이조판서를 지냈던 나만갑의 「유한록」에는 청나라에 바친 공물중 200담의 차가 들어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담은 짐꾼 한 사람이 질 수 있는 무게로 약 40∼50㎏. 200담이면 10톤 가까운 무게인데 지금으로서도 어마어마한 양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약 350여년전 이곳에 주둔했던 원나라 군사들이 이곳 차를 본국에 보내기 위해 우리 백성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충분히 상상이 간다.<김대성 편집위원>김대성>
◎알기쉬운 차입문/비싼 것보다 입맛에 맞는 차 선택부터
우리가 흔히 마시는 차를 녹차 또는 잎차라고 한다. 녹차는 발효시키지 않은 차로서 푸른빛을 지니고 있다. 찻잎이 부숴지지 않고 잎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푸른 빛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찻잎. 이 찻잎이 오늘날 가장 쉽게 접하는 우리 차의 모습이다.
그러나 막상 차를 고를 때면 망설이게 된다. 한 통에 적게는 몇천원에서 많게는 10만원이 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포장에 적혀 있는 「우전」이니 「세작」이니 「중작」이니 하는 차종류에 따라 값이 다르다. 우전차는 모든 곡식이 소생하도록 비가 오는 곡우절 전에 만든 차이고, 세작은 어린잎, 중작은 다 자란 잎으로 만든 차이다. 우전이나 세작이 중작보다 비싼 것은 생산량이 적고 채취와 차를 만드는 과정에 손이 더 많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리산, 보성, 광주 등 여러 지명과 함께 구름 위라는 뜻의 「운상」, 겨울에도 꽃이 핀다는 「화개」 옥구슬을 뜻하는 「옥로」 등 시적인 이름이 붙은 차도 많이 나와 있다.
알아둬야 할 것은 대부분 이 이름들은 차의 특성보다는 차생산자들이 붙인 상품 이름이라는 점이다. 물론 구름위에서 차를 마신다거나, 차를 마시면 마음속에 꽃이 핀다거나, 가슴속에 보배로운 향기가 가득 차는 모습을 연상하면 차 맛이 좋아지긴 할 것이다.
차는 기호음료이기에 자신의 취향에 맞는 차가 가장 좋은 차이다. 대체로 우전은 여린듯 하면서도 은은한 맛이 좋고, 세작은 부드럽고 싱싱한 맛을 자랑하고, 중작은 강렬하고 푸른 맛을 준다. 이런 요령으로 차를 구입하면 되겠지만 아직도 차를 고르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마시는 분위기에 취해 차를 마시기 시작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맛을 차츰차츰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우선 차맛에 익숙해져야 차를 고를 수 있게 된다. 비싸다고 반드시 좋은 차는 아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차를 찾는 일이 바로 차생활의 시작이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박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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